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얼마 전 세미나 때문에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가게 되었다. 하루 종일 진행되는 포럼이었는데, 요즘 디지털 비즈니스 관련 포럼이라는 게 사실 다 거기서 거기라 트랙을 아무리 뒤져도 크게 관심이 가는 세션이 별로 없었다.
오전의 기조연설들 까지는 버텨낼 수 있었지만 오후 트랙을 몇 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지쳐버리고 말았는데, 그것을 자각 하자마자 일각의 고민도 없이 바로 호텔 지하와 연결된 코엑스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럴 때는 약간 걸으면 다시 괜찮아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디를 지나는지 천천히 머릿속에 담아 가며 이동하는데, 무지 매장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가니 벽 쪽에 세상에서 제일 높을 것 같은 책장이 보였다.
그곳의 이름은 ‘별마당 도서관’, 신세계 그룹에서 운영하는 무료 도서관으로 5월 말에 오픈을 했다고 한다. 무료 도서관이니 누구든지 책장에서 바로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는데, 구매는 불가능하니 너무 맘에 들어 집으로 들고 가고 싶은 책을 만나지 않게 되길 바래야 한다.
천천히 근처 책꽂이 앞 의자에 앉아 책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다음 세션이 시작될 시간이 되어 코엑스 산책은 무산되고 말았지만, 기분은 확실히 다시 좋아져서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걸어 집으로 가고 있는데, 스타벅스 창 옆 길바닥에서 매장 불빛에 책을 읽고 있던 노숙자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그와는 달리 책 한권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요즘도 한참 정신 없을 때면 문득 그 생각이 나면서 ‘그 여유는 대체 뭐였을까?’ 하게 된다. 사계절 내내 얼어죽을 염려 없는 날씨가 주는 안정감도 없진 않았겠지만, 그건 같은 곳에서 지내던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살기 좋은 사회라는 것에는 여러 다른 기준들이 있을 거다. 생활도 중요하므로 최저 시급이라든지 고용의 확대 같은 것도 살펴야 할 테고, 노후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연금제도라든지 여러 복지 기관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도 필요할 것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길을 가던 노숙자나 아이들도 어떤 신분의 제약 없이 편하게 책꽂이에서 책을 집어 들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에 더욱더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매월 11일은 ‘책 나눔의 날’이라 해서 개인 책을 기부받기도 한다 하니, 다음에 오게 될 때는 책장에서 잠들어 있던 책 몇 권을 들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