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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amb Mar 17. 2019

술자리 아키텍트를 위한 헌사(獻辭)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나는 술을 잘 못 마신다. 그래서 재미있는 혹은 아주 친한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아니면 굳이 가지 않는 편이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자리라도  

‘그래도 술은 마실 수 있으니까.’

하면서 참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술을 조금 마시면 금방 취해 피곤해지고, 그러면 어떤 상황이라도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아니 가고 싶어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행동에 옮긴다. 중요한 윗사람과의 모임이던, 십 년 만에 보는 친구와의 만남이던, 연예인과 한잔 하던 중이던 - 물론 그런 적은 없지만 - 상관 않고 그냥 바로 일어나서 가방을 들고 집으로 가버린다.
가방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늘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게다가 이것저것 많이 넣고 다녀서 꽤 무겁다. 딱히 밖을 많이 돌아다니는 성격도 아닌데, ‘막상 뭔가 필요할 때 없으면 어쩌지?’하는 생각에 랩탑부터 수첩, 책, 충전 케이블까지 가방이 터지도록 챙기는 편이다. 물론 다니며 가방을 한 번도 열지 않은 적도 있지만, 가지고 다니던 ‘유심 핀’을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한 적도 있으니까.
그런데, 희한하게 아무리 취해도 가방을 잃어버린 적은 한 번도 없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어보면 취해도 수시로 ‘내 가방 지금 어디 있지?’ 하며 확인한다고 하는데, 정말 믿음직스러운 성격 아닌가요? 하지만 지하철에 놓고 내린 우산이 열 개도 넘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어쨌든 술자리는 부르면 갔지 직접 만들어본 적은 없는데, 그게 요즘은 조금 고민거리가 되어버렸다. 술을 못 마시긴 했지만 - 그래도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 지속적으로 조금씩 마시다 보니 지금은 어느 정도 마실 수 있게 되어 버렸고, 그러다 보니 가끔 한잔 하고 싶어 지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술자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던 거지?


별생각 없었을 때는, 봄에 잔디가 올라오듯, 여름에 장마가 오듯, 그냥 때가 되면 어딘가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술자리들은, 작가가 글을 쓰고, 작곡가가 곡을 만들고, 개발자가 프로그램을 찍어내듯, 누군가가 진땀 흘리며 이행해냈던 프로젝트였을지도 모른다.
나라면 어떻게 그 난해한 프로젝트를 시작할지 백지상태에서 한번 고민해 봤는데, 가장 먼저 부딪친 게 바로 타이밍이다. 보통 얼마 전에 모임을 구상하고 언제 연락을 돌려야 하는지 하는 그런 것.

기억을 뒤져보니 주선자들은 대부분 1~2주 전에는 연락을 해왔던 것 같은데, 이건 좀 놀라웠다. 그들은 대체 그날 술이 마시고 싶어 질지 일주일 전에 어떻게 알았던 거지? 술자리 아키텍트들은 오래된 경험을 바탕으로 ‘이때쯤 나는 술이 마시고 싶어 질 것 같아’하고 촉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가끔 한잔 하고 싶어 졌을 때는 늘 바로 ‘지금’이었기 때문이다.

술에 공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금 당장 나와’라고 할만한 술친구들도 꽤 많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술자리의 당일 이행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내 친구들은 대부분 나처럼 술을 잘 못 마시거나, 술을 잘 마신다고 해도 - 내가 잘 못 마시기 때문에 - 같이 마주하고 술을 마셔본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아마 내가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하면 분명히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볼 테지. 그러면 나는,

‘그게 아니고, 내가 술을 원래 못 마셨잖아. 그런데, 술자리를 가지기는 했으니까 - 입담배를 피우다가 속담배로 넘어가듯 - 점차로 술을 조금 마실 수 있게 된 거거든. 그런데, 그렇게 된 이후로 가끔 술이 마시고 싶어 질 때가 생겼다는 거야. 아니, 누가 마시자고 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마시고 싶어 질 때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라고. 아니! 담배를 피우게 된 게 아니라...


..
 
그냥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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