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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amb Dec 14. 2019

전자비서와 도장 찍어주는 로봇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The Verge 사이트에서 ‘이제 알렉사로 애플과 스포티파이의 팟캐스트를 플레이시킬 수 있습니다 Apple and Spotify can now play podcasts on your Alexa-enabled devices’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알렉사 Alexa는 애플의 시리 Siri, 구글의 구글 어시스턴트와 같은 아마존의 음성 비서 서비스로, 사용자들은 해당 서비스를 통해 음성으로 여러 조작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에 비교적 익숙한 나도 이 기사를 보면서 했던 생각은 역시 ‘그게 안됐던 거였어?’였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현시대 사람들은 광대한 테크놀로지 필드 안에 놓여있고, 싫든 좋든 그 바운더리 안에서 그것들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늘 뱅뱅사거리 즈음에서 바라보는 안개 속 월드타워 같다는 것이 문제다.

옛날에는 모든 게 직관적直觀的으로 이해가 가능했고, 가시적可視的이었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건네면, 그에 상응하는 값어치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책을 받을 수 있다. 받은 순간 그 책은 내 소유가 되며, 언제든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 베고 자거나, 라면 냄비를 올려둘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헌책방에 넘기거나, 버리게 되면 더 이상 그 책을 내 생에서 만나볼 수 없게 된다.


감각적인 관계의 단절

명시적인 소유권의 소멸


음악을 듣고 싶으면 레코드점에 가서 CD를 구매하면 되고, 일단 구매하면 내가 원하는 때에 실물의 감촉을 느끼며 구동시켜야 한다. 음악을 듣는 동안에는 CD 북클릿을 넘기며 트랙 이름을 확인하고, 각 곡의 세션들을 확인하고, 그들의 스토리를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직접 서점에 책을 구매하러 가는 대신에 스마트폰 혹은 태블릿에서 터치 몇 번만 하면 바로 원하는 작가의 책을 구매할 수 있고, 월 단위 구독만 하면 세계 모든 음악가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갑에 현금을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전자 결제 앱들로 오프라인에서도 쉽게 지불이 가능한 세상. 대충 직관적으로 구조를 비교만 해봐도 테크놀로지가 스며든 새로운 방식들이 기존 실물 비즈니스보다는 간단하고 편하다. 물론 실제 사용자의 경험도 - 메커니즘은 백 프로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 대부분 이전보다는 나아졌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뉴 테크놀로지 프레임웍이 모든 구성원들의 보편적 동의 안에서 만들어져 온 것이 아니고, 특정 서비스 제공자들에 의해 제시되었기 때문에 명확한 표준 혹은 유효 바운더리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어떤 서비스라도 그 뒤에는 여러 인프라 서비스 제공자들이 서로 의존성을 가지며 존재하고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사용자들은 일단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쉽게 해결할 수가 없다.  


편하게 구매해서 앱으로 잘 보고 있던 책을 오늘부터 갑자기 볼 수 없게 된다면, 사용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우선 그 이북을 판매하던 기업이 망하게 되면, 사용자들은 돈을 주고 책을 구매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그것을 볼 수가 없게 된다. 사실 아직 그런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북을 구매하는 사용자들도 꽤 있다. 실물이라면 발간한 출판사가 망한다고 해도 책장 안의 책은 그대로 내 소유로 남아있는 게 당연하고, 그런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면 구매했지만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상황이 쉽게 이해될 리 없다.

원터치 만으로 지불 가능한 전자 결제는 환상적이지만, 매장마다 지원하는 전자 결제가 다른 것은 또 다른 불편이다. 현금은 세상 어느 매장을 가더라도 점원들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데 말이다.


그런 실물과 비슷한 연결선 상에 있는 서비스들도 헛갈리는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전자적 음성 비서라면 더욱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가 말하는 것들을 그대로 인지하고 그에 상응하는 작동이나 서비스 호출 등을 해준다는 것은 직관적이지만, 음성 비서 서비스의 제공자에 따라 어떤 서비스는 가능하고 어떤 서비스는 불가능하고 하는 것들까지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다. 심지어는 각 서비스나 오퍼레이션 시스템의 제공자들 간의 협약에 따라 세부적인 기능 작동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니. 인생이라는 건 그런 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알렉사. 팟캐스트 틀어줘.’


‘어제까지는 제가 팟캐스트를 구동시킬 수 없었는데, 다행히 오늘부터는 애플과 협약이 완료되어 플레이시켜드릴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은 운이 좋군요. 하지만, 어제 듣고 계셨던 부분에서부터 다시 이어 들을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은 - 세부 계약 조항에 따라 - 불가능하답니다. 만약 이어 듣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애플에서 제공하는 시리 Siri에게 부탁하세요. 저보다는 잘 못 알아듣겠지만요.’


‘…… 그럼 시리를 불러줘.’


‘주인님, 저는 아마존의 서비스이기 때문에 - 세부 계약 조항에 따라 - 애플의 서비스를 함부로 불러낼 수는 없다고요. 만약 제 서비스를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라면 저는 그냥 들어가 볼게요. 시리를 부르는 방법은 애플의 매뉴얼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알렉사. 시리를 부르는 방법이 있는 매뉴얼을 보여줘.’


‘주인님, - 내부 규약에 따라 - 경쟁사의 서비스 사용을 부추기는 액션은 취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요. 미안해요. 대신 애플 서비스를 규탄하는 사이트를 열어드릴까요?’


‘………꺼져.’


(사실 이번에는 협약이 잘 되어서 알렉사로도 팟캐스트 이어 듣기까지 잘 작동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부터는 갑자기 안될 수도 있다. 테크놀로지 서비스 제공자 간의 규약은 모두 자사 서비스 증대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 마치 국제 정치처럼 - 피도 눈물도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환경 속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순박한 사용자들이다.



얼마 전에 일본의 AI+라는 사이트에서 덴소와 히다치가 계약서를 넘기면서 자동으로 도장을 날인하는 기계를 개발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건 ‘너무 간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자동으로 생성된 PDF 계약서에 도장 이미지를 오버랩시켜 붙이고는 아무도 모르게 상대 회사에 메일로 훅 보내버리는 시스템보다는, 내가 보는 눈 앞에서 말 잘 듣는 로봇이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도장을 꾹꾹 찍는 모습을 보는 게 더 뿌듯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로봇이 도장이 다 찍힌 계약서에 스태플러를 쿡 찍어서는 각기춤을 추듯 내게 전달해준다면 나도 모르게


‘수고했어.’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구매한 이북 서비스 회사가 망하지 않고 계속 서비스를 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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