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대한 철학적 고찰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테드 창

by Aprilamb

SF소설의 필수요소는 뭘까요?


사람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미래 세계에 대한 예측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세상에 없던 무기, 새로운 이동수단, 지금과는 다른 생활방식, 그리고 인간과 흡사한 로봇 같은 것 말이죠. 보통 SF소설은 이런 상상 속의 환경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갑니다. 미래적 요소는 대부분 이야기를 위한 소품으로 활용되지만, 그것에 존재론적 -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관념론 - 의미를 부여하며 철학적인 고민을 유도하는 작품도 있죠. 테드 창은 그의 작품에서 후자처럼 테크놀로지의 진화에 의한 사회 보편적 정서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사회적 가치관의 혼란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꽤 유명한 SF 소설 작가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작품은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그리고, 대부분 중단편이죠. 이런 예를 접하게 되면 ‘이 분야에서 성공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요? 화나서 호날두 유니폼을 태우는 영상으로 구독자 75만을 달성해낸 유투버 <소련 여자>를 보고는 '유투버, 도전해볼 만하겠는데?' 하게 되는 것처럼.

SF가 판타지와 다른 부분은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있음 직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것인데,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려면 제대로 된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는 전공이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이었는데, 그것을 몰랐던 사람이라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과학이나 IT 방면에 박학다식합니다. 작품을 보면 테크놀로지 요소들이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녹아있어요.


이제 살짝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관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단편이긴 하지만 등장하는 주인공이나 디지언트(인공지능을 탑재한 객체)가 비교적 많고, 실제 세계와 데이터 어스라는 가상세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도입부가 술술 읽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 놀라운 흡인력을 발휘해서 독자가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데요. 줄거리를 대충 소개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주인공인 애나는 게임회사인 블루감마 사에서 만든 가상공간, 데이터 어스에서 디지털 애완동물인 디지언트를 학습시키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익 문제로 블루감마 사는 해당 서비스를 종료하게 되고, 디지언트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일부 사용자들은 자신들만의 데이터 어스를 개설하고 계속 디지언트를 성장시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특정 회사에서 이들에게 디지언트를 학습시켜 사이버 성적 도구로 만들자는 제안을 하게 되는데...


디지언트에게 사랑과 그에 수반되는 성적 행위를 학습시켜 상업적인 가치를 부여하겠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잭스(애나의 디지언트)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애나는 갈등합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디지언트를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진화시켜야만 하고, 그것은 애나가 꿈꿔왔던 모습과 닮아있거든요.


.......


'인공지능의 주체를 하나의 인격체(법인)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SF 소설이나 영화의 화두였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른 SF물처럼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그 결론을 내려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해당 테마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닌 거예요.


이 소설에서 디지언트라는 인공지능을 사용한 객체는 자식, 애완동물과 같은 존재로, 애정을 주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새로운 미래의 사회적 대상입니다.

최초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데는 프로그래밍 기법을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딥러닝을 많이 이용하고 있죠. 사용하는 측에서는 어떤 방식을 사용했는지보다는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더 중요하겠지만, 철학적으로 두 구현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작동면에서 보면 전자는 프로그래밍을 한 사람의 의도대로만 움직이게 되고, 후자는 어떻게 움직일지 100%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어요. 전자의 경우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류죠. 문제가 발생해도 오류를 수정하면 다시 잘 작동할 겁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을 만한 학습을 다시 시키며, 해당 문제를 피해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학습에는 시간이 걸리고, 학습 이후에도 문제가 해결된다고 확신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 과정은 살아있는 아이를 키우거나 애완동물을 길들이는 과정과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작가는 이런 딥러닝의 알고리즘적 특성을 통해 디지언트를 아이와 동일한 대상으로 승격시키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요.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성장하는 아이는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의지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됩니다. 하지만, 모두 부모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는 않죠. 누군가는 테러 집단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결국 애나는 디지언트가 자신의 품 안에서 원하는 대로 작동하게 되는 것보다는,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디지언트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뒤에서 응원하고 지켜봐 주겠다는 결심을 한 거죠.

작가는 주인공인 애나를 통해 특정 주체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심 어린 사랑과 의지가 필요하며, 구속이나 관리보다는 동등한 관계임을 인정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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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읽고 난 후에 ‘내가 읽은 게 SF 소설이었나?’ 하게 만드는 작가,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올해 처음 추천작으로 건네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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