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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amb Mar 16. 2020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사는 동안에는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할 일들은 절대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촘촘하게 준비되어 있다. 누가 준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준비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런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일상 쳇바퀴 위에 놓인 일 뒤쪽에 숨겨진 다른 일들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같다.


잘 몰랐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내 의지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혼자 살 때는 특히 더 그랬다. 나 자신만 컨트롤하면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을테니까. 그래서 주말이면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하며,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쪽으로 고개를 고정시키고는 눈동자만 움직였었다. 마치 내가 집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대부분 그런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쌓아 두었던 책들이 무너진다던가, 그때까지 잘 사용했던 냄비 손잡이가 툭 떨어져 나간다던가, 토스터기 옆이 생산공장인 것처럼 끊기지 않던 키친타월이 떨어지는 일은 정말 흔했다.



작심하고 그런 것들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해도, 가만히 있다 보면 평소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이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거기에 더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까지 머릿속에 스멀스멀 떠오른다. 누군가가 겹겹이 준비해 둔 할 일들을 텔레파시로 전달하는 것인지, 평소에 내가 심연에 묻어두었던 할 일들이 고개를 드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 되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든, 인기 있었던 드라마의 연작이든,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어나셔야죠... 빨리 일어나라고 이 자식아, 당장!’

마음속의 울림은 내 목소리 같기도 하고 남의 목소리 같기도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바로 반응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천천히 마스크를 하고는 집안을 돌며 텔레비전, 컴퓨터, 식탁, 냉장고, 책장 위의 먼지를 떨고, 그것들이 바닥에 조용히 내려앉을 동안 물걸레로 다시 먼지를 떨었던 부분을 훔쳐준다. 그 작업이 끝나면, 전기청소기로 바닥을 민 후 바닥 걸레로 완전히 먼지를 제거해 준다. 나는 의지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통은 이 정도에서 멈췄던 것 같다.
물론 멈추는 것은 바닥 청소 후가 아니라 침대 앞에서 인데, 침대보를 들어내고 이불 커버를 벗겨내기 시작하면 이후 세 시간 동안은 갤리선(레미제라블에서 등장했던 지중해를 건너는 큰 배의 이름)의 ‘수부’가 노를 젓듯, 쉬지 않고 노동을 해야 하니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빨래까지 하고 나면, 그날은 끝까지 가는 거다.
그 후 냉장고에서 오래된 식재료들을 하나하나 골라내고, 비닐봉지에 둘둘 말아 대충 넣어둔 남은 재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그리고는 구매해야 할 식재료 목록을 만들어 집 근처의 마트를 찾는다.


물론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지긴 하지만,


가끔 빨래방에서 건조가 막 끝난 부들부들한 빨래 위에 엎드릴 때나, 마트에서 짤랑거리던 동전을 모두 써버릴 수 있게 되거나, 식빵을 사 왔을 때 지난번에 남았던 한쪽의 짝을 맞출 수 있게 되거나(나는 늘 두 개씩 짝을 지어 지퍼락에 담아 두었다), 마트에서 사 온 카레로 저녁을 준비하며 마침 남아있는 감자조각과 양파를 모두 털어 넣을 수 있게 되면 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하면 정말 알 수가 없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생활을 위한 일들에 그렇게 하루 종일 나 자신을 소비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렇게 알차게 하루를 보냈던 적이 있었지!’ 하는 생각은 가끔 하게 된다. 살아오면서 뭔가를 위해 하루가 가는 줄도 몰랐던 다른 경우 - 일을 한다든지, 공부를 한다든지 - 도 꽤 있었는데, ‘알찬 하루’를 보낸 경험이라고 하면 그런 것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할 때,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또 보람차다고 생각하는 건 왠지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그 일이 아무리 가볍더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장이나 좀 정리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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