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암벽화 디자인은 다 그 모양일까? 왜 발은 그리 아픈 것일까?
휴일 전날의 종로 5가는 적막하다. 7시를 갓 넘긴 시각이지만 문을 닫은 상가는 꽤 되고, 그나마 불이 켜진 상가도 셔터를 내릴 채비로 부산스럽다. 원래 7시를 넘으면 다들 문을 닫는가, 서둘러 올 걸 그랬나 후회를 하던 차에 종로산악을 찾았다. 다행히도 불이 켜져 있었다. 장사하십니까? 그렇다는 말에 암벽화를 보러 왔다고 하고 우선 구경을 시작했다.
축구를 하려면 공이 있어야 하고 테니스를 하려면 라켓이 있어야 하듯, 클라이밍에도 필요한 장비가 있다. 바로 암벽화다. 클라이밍을 하게 되면 정말 손톱만큼만 튀어나온 작은 홀드에 체중을 싣고 움직이거나, 발을 바꾸어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사실 그런 일만 일어난다). 이런 홀드를 디디고 발끝으로 설 수 있도록, 암벽화는 발가락이 움직이지 않도록 발끝을 좁게 모으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밑창은 비브람 등의 거친 재질의 고무로 처리되어 발끝뿐 아니라 발등, 발뒤꿈치까지 감싼다. 홀드에 발등이나 뒤꿈치를 거는 고급 기술을 구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중요한 운동장비를, 나는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5개월이나 지나서야 사러 왔다. 그전까지는 아버지가 물려준 오래된 보레알(Boreal) 브랜드의 암벽화를 신고 했지만, 연세도 알 수 없는 이 친구의 앞코 스웨이드가 해져 발가락이 보일 지경이고 겉에서는 까망베르 치즈와 땀냄새를 뒤섞은 듯한 구수한 냄새가 나는 데다(진짜로 '구수'한 냄새가 나서 깜짝 놀랐는데, 암벽화의 어두운 내면에서 모종의 발효과정이 진행된 듯하다), 밑창도 닳아 마찰력을 잃어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때가 온 탓이다. 클라이밍장의 선생님께 암벽화를 보여드렸더니 "이 고대의 유물은 어디서 출토된 건가요?"라고 대답하셨고, 그 순간 나는 새 암벽화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선생님의 조언으로 암벽화 메이커와 모델, 매장을 알아보고 직접 사러 왔다. 선반에는 화려한 색의 조합을 갖춘 암벽화들이 자르륵 놓여 있다. 노란색과 빨간색과 검은색 등등을 매치시킨 암벽화 특유의 색감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된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몇 가지를 신어보았다.
"다 신으셨으면 서서 여기 올라가 보시겠어요?"
"발가락이 움직이지 않도록 발끝을 좁게 모으는 형태"의 신발을 신는다고 가정했을 때에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결론은, 발이 아플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가 어떤 식으로 얼마나 아플지는 직접 신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다. 세상에, 발레 무용수들이 토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설 때가 이런 느낌일까? 신발 전체가 발을 조이는 데다, 밑창이 단단한 재질이기 때문에 발 전체가 아프다. 30초를 버티기 힘들 지경. 점원님이 올라가라는 곳에 올라갈 수는 있겠는데, 발뒤꿈치가 화끈거린다. 이빨이 빠져버린 정체불명의 괴물이 내 발을 입에 집어넣고 오물오물 씹는 느낌. 그런데 이걸 신고 발끝으로 벽을 디디고 매달리고 뛰어다녀야 한다는 말이지?
암벽화는 자신의 발보다 한 치수 작은 것을 사라곤 한다. 사이즈 260mm의 운동화를 신는 사람의 경우 250mm의 암벽화를 구입하라는 말이다(물론 사이즈는 브랜드마다, 신발마다 다르니 매장에 가서 직접 신어보는 것이 제일 좋다). 작은 신발을 사야 하는 이유는, 발에 딱 맞는 크기의 신발을 신었을 때 암벽화 속에서 발가락이 움직이지 않아 홀드를 디디기 편하고, 신발은 신다 보면 늘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볼더링 겨우 5개월 차이고 프로만큼 잘할 수도, 잘 할 필요도 없는 내가 꼭 지켜야 하는 조언은 아니다. 실제로 요즘에는 좀 더 여유롭고 편한 사이즈의 신발을 많이 찾는 추세라고 한다. 이전에 발 사이즈를 측정했을 때 내게 적당한 암벽화의 사이즈는 유럽 식으로 38.5(삼팔반) 사이즈라고 들었지만, 실제로 신어보니 너무 아파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였다. 결국에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39 사이즈의 신발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여 고른 신발은 라 스포르티바의 오타키(otaki). 매장에 들르기 전 마음속으로 고민하던 신발 종류가 한 세 가지 있었다. 그중 테나야의 오아시(Oasi)는 예쁘고 신발도 괜찮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신고 있었다(우리 클라이밍 짐에서도 내가 본 사람만 대여섯 명이 신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걸 신으라고? 말 도 않 되). 스카르파의 포스 X(Force X)는 색감도 괜찮고 중급자 용이라 가격도 저렴했지만 신발 코가 뾰족하지 않고 바닥이 평평해서 볼더링 용으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그리고 동생 놈은 '신발 이름이 좀 그렇지 않냐'라고 했는데, 동감하는 바이다). 그러고 나니 남은 것이 흰색과 검은색, 에메랄드 파랑과 당근 주황의 색 대비가 인상적인 오타키밖에 없었던 것이다.
클라이밍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크게 쓴 돈이고, 이제 내가 정말로 이 운동을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돌아오는 길은 뿌듯했다. 물론 새 신발을 사는 것과 신는 것, 신고 운동을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겠지만. 얼른 새 신을 신고 홀드 위에서 팔짝 뛰어보고 싶어서,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문 닫을 시간이 30분도 남지 않은 클라이밍 짐에 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암벽화에 발을 집어넣고 일어서는 순간, 나는 이 신발에 적응하려면 꽤나 지난한 시간을 거쳐야 할 것임을 발끝으로 직감했다.
하지만 글이 길어질 테니, 새 신을 신고 팔짝 뛰어보는 일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