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앞의 등불, 시대 앞의 인간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

by 비둘기

얼마 전 거대한 산불이 났다. 많은 이가 고통받았다. 누군가는 평생의 보금자리를 잃었다. 하나뿐인 생명을 잃은 이도 있다. 이들은 아무 죄가 없다. 불을 끄려는 노력도 소용없다. 대자연의 심술에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시대의 아픔도 산불과 같다. 아무 잘못 없어도 벌을 받는다. 벗어나려고 애써도 벗어날 수 없다.

맹자는 말했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

넉넉한 마음은 먹고살 만해야 생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 평생을 힘들게 모은 재산을 기부하는 이들. 가난하지만, 이웃에게 늘 친절을 베푸는 이들. 인간을 초월한 인간. 이데아적 인간. 군자君子. 하지만 보통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며칠을 굶으면 절로 빵을 훔치고픈 생각이 든다. 애써 농사지은 곡식을 수확도 못 하고 압류당하면 꼭지가 돈다.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 혼란, 한국 전쟁까지. 우리 근현대사는 항심恒心을 품기 어려운 시대였다. 착하고 부지런하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온다는 명제가 거짓이던 시절이었다. 김정한 작가는 그 시절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20p.

“이 사람이 버릇없이 왜 이럴까?”

“살고 봐야 버릇도 있겠지요.”

<사하촌>


115p. “우리 조마이섬 사람들은 지 땅이 없는 사람들이요. 와 처음부터 없기사 없었겠소마는 죄다 뺏기고 말았지요.

125p. “없는 놈이 할 수 있나.

그저 이래 죽고 저래 죽는 기지 머!”

<모래톱 이야기>


277p. 가야 부인의 시댁뿐 아니라 부락 자체들도 아직 신통한 해방 덕을 못보았다. 첫째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다가 돌아오는 사람은 거지가 되어 오거나 병신이 되어 왔다. 더구나 ‘여자 정신대’에 나간 처녀들은 한 사람들도 돌아오질 않았다. …. 그러나 한편 불행하리라 믿었던 이와모도 참봉의 집은 반대로 활짝 꽃이 피어 갔다. 고등계 경부보로 있었던 맏아들은 해방 직후엔 코끝도 안 보이고 어디에 숨어 있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문만 떠돌더니, 뜻밖에 다시 경찰 간부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고 몇 해 뒤엔 어마어마하게도 국회의원으로 뽑혔다.

<수라도>



우리가 사는 지금은 어떻게 기록될까? 누군가는 단군 이래 가장 살기 좋은 시기라고 말한다. 절대적 빈곤은 사라진 시대. 노력한 만큼 보상해주는 시대. 자유로운 시대.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시대. 누군가는 옛날이 좋았다고 말한다. 각박하지 않은 시절. 이웃 간의 정이 있던 시절. 낭만이 있던 시절. 끝없는 비교가 없던 시절.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그저 궁금하다. 훗날 지금은 어떤 시대로 기억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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