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한 몰락
올해는 참 잔병치레가 많았다. 겨울엔 발목이 문제였다. 달리다가 다친 발목은 금방 나을 듯 낫지 않았다. 빨리 낫고 싶어 이것 저것 해보았지만, 푹 쉬는 게 답이었다. 발목이 괜찮아질 때쯤, 매서웠던 날씨도 조금 포근해졌다.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천천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올해 봄은 유달리 샘을 많이 냈다. 따뜻해졌다 싶으면 갑작스러운 추위가 찾아왔다. 둔한 나는 날씨에 맞는 옷차림을 갖추지 못했다. 얇은 옷을 입고 달리며 추위를 견뎠다. 뛰다 보면 괜찮아졌지만, 다음 날은 괜찮지 않았다. 한 주를 달리면, 한 주를 감기로 앓아누웠다. 이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달리고 싶은 마음도 점점 사라졌다. 작년 겨울에 신청했던 마라톤 대회들은 모두 완주를 목표로 달렸다. 최선을 다해도 좋은 기록을 내지 못할 것을 알기에 했던 비겁한 선택이었다. 올봄 풀코스 1번, 하프 코스 1번을 작년보다 못한 기록으로 완주했다.
어제는 올해 첫 10km 대회였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한 대회였다. 대회 전날 배번표를 옷핀으로 옷에 고정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얼마나 느려졌을까? 신발, 시계, 옷을 모두 챙긴 후 결심했다. 이번엔 피하지 말자고. 최선을 다해 달리고, 몰락한 내 모습을 받아들이자고. 과거의 기록은 버리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내가 나간 대회는 <빵빵런>. 기념품으로 빵을 푸짐하게 주는 대회였다. 귀여운 대회 이름처럼 대회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친구들과 나도 귀여운 빵 캐릭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출발점으로 갔다. 그곳에는 햄버거 옷을 입은 사람, 루돌프 옷을 입은 사람, 식빵 머리띠를 한 사람 등 다양한 패션 리더들이 있었다. 웃음을 가득 머금은 그들을 보면서도 내심 긴장했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느려졌을까.
출발 시간이 됐다. 출발선을 넘었지만, 사람이 많아서 빠르게 달리기 어려웠다. 이리저리 피해가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1km를 4분 10초쯤 걸려 통과했다. 지난 가을 세웠던 내 최고 기록과 비슷한 속도였다. 1km를 지나니 길도 막히지 않았다. 조금 무리같았지만, 이대로 쭉 달려보기로 했다. 그래! 아직 나 죽지 않았다. 9km만 참자. 아자! 파이팅!
잠시 후 언덕이 나왔다. 아직 초반이라 체력이 남아있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언덕을 올랐다. 하지만 언덕을 오르고 나니,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때 직감했다. 아.. 오늘은 망했다. 5km 반환점을 지나고 나서부터 그만 달리고 싶었다. 멈춰서 쉬고 싶었다. 그냥 걸을까도 고민했다. 속도는 급격히 느려졌다. 속이 좋지 않았다. 10km가 풀코스만큼 길게 느껴졌다. 결승점을 통과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기록은 45분 30초. 1년 전, 풀코스 한 번 안 뛰어봤을 때보다 못한 기록이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메달 받는 곳도 멀게 느껴졌다.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메달과 기념품을 받았다. <빵빵런> 이라는 이름답게 빵을 푸짐하게 주었다. 손에 쥐어주신 노티드 도넛을 한입 베어물며 생각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어제 먹은 매운 치킨? 맥주? 오늘 준비 운동을 너무 안했나? 처음에 너무 빨리 뛰었나? 여기 코스가 언덕이 많은가? 더한 언덕도 잘 달렸던 것 같은데. 아니다. 그냥 내가 그동안 너무 안 달렸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