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최종 검진에서 완전관해 판정을 받고 머릿속은 감사한 이들의 얼굴로 가득 찼다. 가족들, 친구들, 교수님과 간호사 선생님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라는 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나를 살릴 건 팔 할이 그 얼굴들이었다. 그들 덕분에 지금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한 얼굴이 또 있다. 내 목의 염증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큰 병원에 가보라며 진료 의뢰서를 써주셨던 동네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 불행하게도 그 심상치 않은 녀석은 림프종이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아직 많이 번지지 않은 초기 상태였다. 자세히 알아보니 나를 괴롭히던 버킷림프종은 공격성이 높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환자가 고통을 느끼고 병원을 찾아오면 이미 몸 여기저기 퍼진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소름이 끼쳤다.
‘동네 이비인후과 원장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큰일 났겠구나.’
만약 내 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날이 온다면 반드시 그 의사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날이 다가왔다. 그런데 방법을 몰랐다. 아픈 척 진료를 보러 들어가서 ‘선생님, 사실 아파서 온 게 아니고요.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라며 말을 꺼내야 할지, 간호사분들께 ‘혹시 의사 선생님께 잠시 인사만 드리고 가도 될까요?’라고 부탁을 드려야 할지, 아니면 간단한 간식과 함께 편지를 전달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다. 병원에 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에 가서 인사드리고 왔다는 글이 많았다. 점심시간 직전이 가장 좋다고 했다. 다음 날 점심시간 직전에 찾아가기로 했다.
막상 결심하고 나니 걱정이 가득해졌다. 괜히 바쁜 시간에 방해만 되는 건 아닌지, 나를 기억은 하실지, 감정에 복받쳐 제대로 감사를 전하지 못하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내도 걱정했다.
“너 내일 가서 또 어버버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곤 내 말투를 따라 하는데, 너무 똑같아서 놀랐다. 기쁨, 설렘, 걱정, 감사함이 뒤섞인 감정에 휩쓸려 잠을 설쳤다.
다음 날 병원 점심시간을 확인하고, 그 시간에 맞춰서 커피와 간식을 샀다. 병원에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몇 분이나 계시는지 알 수 없어서 넉넉하게 샀더니, 양손 가득 커다란 봉지를 들어야 했다. 대머리를 감추기 위한 비니에 마스크까지 쓰고 커다란 봉투를 양손 가득 든 모습은 꽤 수상해 보였다. 그렇다고 집에 돌아가서 커피 12잔을 나 혼자 다 마실 수도 없었다. 용기를 내서 병원 문을 열었다.
역시나 간호사님들은 수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점심시간 직전엔 환자가 거의 없다는 인터넷의 글과 달리 대기하는 환자들도 많았다. 그대로 다시 문 밖으로 달아나버릴까 고민했지만, 이미 간호사님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분께 다가가 커피와 간식을 건넸다.
“000 원장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왔는데요. 우선 이건 선생님들 나눠 드세요.”
간호사님께서는 아직 수상함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물으셨다.
“어떤 분이라고 전해드리면 되죠?”
“비둘기입니다.”
“혹시 근데 누구신가요? 진료받으셨던 환자 분이신가요?”
아. 내가 가장 중요한 정보를 빠뜨렸구나.
“네, 맞습니다. 혹시 오전 진료 끝나시면 잠시 원장님께 인사 좀 드려도 될까요? 괜찮으시다면 진료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네. 원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잠시 병원 의자에 앉았다. 휴대폰을 보는 척하면서 무슨 말씀을 드릴지 생각했다. 아무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연습도 했다. 신기하게도 점심시간 1시가 되자 진료가 정확히 끝났다. 진료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비둘기님 들어오세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셨다.
“오랜만에 어쩐 일이세요?”
드디어 연습했던 대답을 했다.
“몇 개월 전에 편도염인 줄 알고 원장님께 진료받았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큰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받아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받아봤더니 림프종이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초기에 발견해서 치료 잘 받고 완전관해 됐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내 무릎을 양손으로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진짜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한테 감사할 게 뭐 있어요. 스스로 잘 이겨 내신 거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번 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실 밖에서는 밝은 얼굴로 커피와 간식을 나누고 있는 간호사분들이 계셨다. 그분들께도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병원을 나왔다.
집에 오는 길이 더없이 즐거웠다. 그날 그 병원 안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환자의 감사인사를 받은 의사 선생님도, 밝은 얼굴로 간식을 나누던 간호사 선생님들도 아닌, 바로 나였다. 감사를 나누는 일이 이토록 기쁜 일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런 간단한 진리를 암에 걸리고 나서야 깨닫다니..
나도 참 어리석은 사람이다.
2025년 항암 치료를 마친 후 완전관해 되었습니다.
현재는 정기 검진을 받으며 회복 중입니다.
이제야 지난 시간을 돌아볼 여유가 생겨 투병기를 남깁니다.
제 투병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가끔 유튜브에서 <생로병사의 비밀>을 봅니다.
건강에 안 좋은 여러 음식과 생활 습관을 보여주는데
가끔은 저런 것 다 안 하면 일상생활이 가능한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읽은 댓글 중에 정말 공감이 가는 댓글이 있습니다.
'이런 것 보다 보면 내가 살아있는 게 기적임.'
듣고 보니 맞는 말입니다.
온갖 위험이 도처에 깔려있는 이 지구에서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어쩌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이 기적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연재는 끝이 납니다.
끝인사는 내일로 남겨두는 게 좋겠지요.
오늘도 행복한 일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혹시나 절망과 마주하시더라도
꿋꿋하게 싸워 이겨내실 거라 믿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