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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청년 Feb 25. 2021

여행에서 돌아왔고 밖은 너무 춥다



새벽 세시, 취한 새벽의 서너 시는 익숙하지만, 맨 정신의 새벽 세시는 어색하다. 자기엔 너무 늦었고 그래도 지금 잔다면 조금의 피로는 덜어낼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시간, 나는 그 희망을 이불처럼 걷어차고 글을 써내려 간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먹기 전엔 배가 고팠고, 배가 고프기 전엔 양치를 했고, 양치를 하기 전엔 칫솔을 사러 슈퍼에 갔다. 밖은 너무 추웠다.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유튜브 동영상 몇 편을 보면서 라면을 먹었는데 이젠 마실 물이 없다. 그러나 더는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 밖은 너무 춥단 말이야. 그냥 물을 마시지 말자, 하면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싱크대 서랍장을 뒤적였다. 보이차 티백이 있다. 아, 보이차를 끓여 먹으면 되겠다. 수돗물을 받아 전기포트에 끓이고 보이차 티백을 담갔다. 차가 우러나올 때까지 세수를 하고 왔다.

 

따뜻한 차를 마셨다. 중국에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 대신 이처럼 차를 즐겨 마신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보이차 성분이 위장의 기름때를 씻어준다고 하더라. 이 때문인지 나 또한 몸이 차분해지고 마음의 때가 씻겨 내려가고 그 자리에 새벽의 침묵과 어둠이 차오르면서 점점 이 시간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무쪼록, 여행이 끝났다. 

작년 이맘때도 그랬듯 배가 아프다. 인도,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 어느 곳에서도 튼튼했던 내 위장은 한국으로 돌아올 때만 되면 슬슬 아파온다. 작년에 적어 놓은 글이 있던가. 인도는 가서도 힘들었지만 다녀온 후엔 더 힘들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깊이 잔 적도 없고 피곤하게 일어난 적도 없고 맛있게 밥을 먹은 적도 없고 변을 시원하게 본 적도 없고, 어떤 일에 흥미나 싫증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좋게 말하면 잔잔했고 나쁘게 말하면 시체 같았다. 붕붕 떠다니는 영혼만 남은 기분. 육신에 활력을 주기 위해 집에서 뚝섬까지 뛰었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날은 지리산 대피소에서 야영을 했다. 그렇다고 정신과 육체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래서 우울했다. 그러다 딱히 어떤 사건 없이 시간이 흘렀고 나도 모르게 괜찮아졌다. 이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희망을 품기도 하고 절망도 하고 화도 나고 그렇다.

 

여행이 끝났다는 건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어떠한 영향이냐면 삶이 재미없고 피곤하고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여행은 재밌고 어렵지 않고 흥미진진하다.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어요. 당장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거기서 무엇을 느끼고 경험하던 나쁜 여행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학청년이니까. 하지만 여행에서 되돌아와 맞닥뜨린 현실은 뭔가 깝깝하다.

  왜일까. 그들의 일상을 탐험하고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은 재밌는데 왜 나의 일상은 이렇게 따분하고 어렵고 두려운 것일까. 왜냐면 여행은 가볍고 현실은 무겁기 때문이다. 여행 속엔 담겨 있는 게 별로 없고, 현실 속엔 너무 많다. 꿈, 바람, 욕망, 기대, 성취 같은 것들. 여행은 내 눈에 담지만 현실은 나를 담는다. 그렇기에 현실은 무거워지고 침전하고 빠져나오기 힘들고 미련이 남는 것이다.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좋아하는 문장이 하나 있다.


Seeking means, having a goal. 
But finding means, being free, being open, having no goal.

여행엔 목적이 없다. 그냥 유람선을 타듯 여기저기 발길 닫는 대로 유람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 사람, 문화를 보고 느낀다. 그게 전부야. being free, being open, having no goal. 그러나 현실은 찾아야 한다. 찾아내야 한다. having a goal. 찾기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꿈을 꾸고 바라고 기대하고 성취해야 한다. 꿈은 커야 하며 간절히 바래야 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그만큼 기대하는 바도 크다. 꿈이 커야 한다니! 마치 그게 전부인 것처럼. 그 전부를 담고 있으니 현실이 그렇게 무거울 수밖에, 가라앉을 수밖에, 숨이 막힐 수밖에. 반짝이는 햇살과 부서지는 파도가 일렁이는 수면에 뜬 기름처럼, 미련이 둥둥 남을 수밖에.


이러한 이유로 내게 여행은 즐겁고 현실은 즐겁지 않다. 

그렇다면 인생을 여행하듯 살아야겠다. 


삶 속에서 어떤 것을 구하지 말고 발견하며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접하며 살아야 재밌는 것이겠거니. 그러한 자세로 살자. 발견하기 위해서는 많이 돌아다녀야지. 새로운 것들을 많이 해야지. 그리고 여행기를 기록한다.




이런 식의 결론은 간신히 쌓은 언어의 탑을 무너트리는, 어른들이 책을 팔아먹을 때나 사용하는 상술이다. 나는 아직 글과 언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으니 조금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 나는 책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기 위해 글을 쓰는 거니까.


분명 지금의 시기에는 바랄 것들이 많다. 졸업을 하기 위해선 영어 성적도 필요하고 이제 취업도 해야 하는데 그것들에 대한 나의 입장은 어떠한가.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고 어렵고 따분하다. 실질적으로 내 삶을 가장 무겁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취업과 진로. 그것은 나의 꿈도 아니다. 크게 꾸어야 하는 대상도 아닌데, 가장 큰 비중으로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무게의 가중치를 더하는 것은 내 태도이다. 왜 이렇게 무겁게 받아들일까. 그것이 전부는 아닌데 말이야. 취업과 진로가 내 여생을 모두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직 시작도 안 했고 어떤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 생각이 타당한가.


히말라야 트레킹 할 때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내가 안나푸르나를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결정한 여행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 계획도 목적도 없었어. 이 여정을 위해 한 겨울에도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을 뛰고 종로 5가를 돌아다니며 등산 장비를 구매했다. 네팔 여행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안내서도 몇 번씩 읽으며 꼼꼼히 준비했다. 이것이 취업 준비나 토익 시험을 보는 것과 무엇이 크게 다른가. 하기로 결정한 일이라면 꿋꿋이 해야 할 뿐이다. 안나푸르나에 아주 머물러 살 게 아닌 것처럼 나의 취업과 진로가 내 남은 삶 전체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나아갈 길에 대한 첫 번째 이정표일 뿐이지, 이다음에 또 어떤 이정표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거야. 출발선이 같더라도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잘 살피면 기회는 있을 거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지 않고 항상 새로운 길을 엿볼 거다. 여행하듯 살 것이야. 인파가 몰리는 관광지나 유명 음식점도 가보고, 현지인들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골목길을 구석구석 누비면서 나 또한 삶의 체취를 남길 것이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며칠씩 머무를 수도 있고, 정말 좋은 터전이 나타나면 거기에 인생을 꾸려도 되는 거잖아. 이 여행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자. 가장 설레는 여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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