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여러 갈등 상황 중에서 가장 심오한 것은, 자신과의 갈등이다. 주인공을 자극하는 주변 인물들도 있겠지만 결국에 어제의 나, 내일의 나,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나와 심리적 각축을 벌인다. 사상이 뚜렷하지 않다면 그만큼의 또 다른 나가 맞서야 할 대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 주자는 '본능적인 나' 그리고 '이성적인 나' 이다. 이런 소설들을 읽고 나면 며칠 간 생각에 잠긴다. 시대가 달라 이해가 되지 않는 이념과 사상들도, 소설 속에 표현된 감정을 매개로 독자의 현실에 주어진 기폭제를 찾아내고 나만의 그것을 상대해본다. 이런 경험은, TV프로그램이나 여행과는 또 다른 감각적인 체험이다.
1850년대 상트 페테르부르크. 방황하는 청년이 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저토록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바깥이 아닌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안이다. 알 수 없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며 황량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골목 골목을 정처 없이 누비다가, 살인을 저지른다. 소설은 뜬금없이 이 살인 사건을 보여주며 주인공이 그것을 저지른 이유와 내면에서 들끓는 감정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한 꺼풀씩 베일을 벗기듯 풀어나간다.
소설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 중에 '농노해방령(1861)'이 있다. 1856년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제정 러시아는 기술적, 경제적으로 뒤처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농노제를 폐지했다. 정부는 영주들로부터 땅을 사들임으로써 그 땅에 예속되어 있던 농노들도 자연스럽게 해방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다. 정부는 귀족들에게 구매한 땅을 다시 잘게 쪼개어 농민들에게 되팔았고 49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나눠 갚게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본업을 포기하고 도시 공업자가 되었고, 이는 공업 사회와 도시 발달을 촉발시켰다.
산업화의 물꼬를 트는 이들이 자본가와 공학자들이라면 그 충격을 견뎌야 하는 사람은 저지대에 있는 부류이다. 새로운 기술과 사상이 봇물처럼 흘러들어오면서 기존의 것들을 휩쓸어가고 그 흐름이 난류에서 층류로 변할 때까지 와류에 휩쓸려야 하는 이들은, 농민과 노동자들이다. 아마 이러한 행태는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반복될 것이다. 그 수원지의 바로 아래에 있는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물질주의적인 악에 침식되어 있으며 화려한 거리, 궁전, 다리 등이 묘사될 때 오히려 강조되는 것은 그 환영과도 같은 표면 아래 도사리고 있는 냉기와 부패, 불행, 죽음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이 몰려 사는 더러운 거리와 골목엔 거지들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그 가운데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있다. 라스콜니코프에게 궁핍이란 그저 사실주의적인 묘사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이념의 부화장이 되는 궁핍이다. 계획을 궁리해 내고 치밀하게 다듬기 위해 낮은 천장, 좁은 방, 배고픔과 악취, 가난이라는 아편을 폐 깊숙이 흡입했다.
과거에는 개인의 빈곤이 그를 소유한 영주나 주인, 또는 그들을 지도하는 지도자의 손에 달려 있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과거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부와 명성을 얻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를 하고 노력한다면 계급을 이동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뤄내지 못했다면 나의 책임이 크다. 소설가 장강명은 이런 세대를 표백 세대라고 한다. 역사가 항상 그래 왔듯 이러한 체제 또한 어느 혁명가에 의해 언젠가 전복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가가 처음에 품었던 생각은 그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생각을 품고 범죄를 저지른 건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그 생각을 만들어 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후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토록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가난한 자가 기근을 못 이겨 탐욕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라고 말하기에 가장 완벽한 모델이다. 이에 반해 소설 '표백'에서는 주인공이 가장 성공 가도를 달리는 시기에 자살을 하도록 만든다. 그럼으로써 이것은 개인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체제적인 결함임을 강조한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잉태한 생각은 두 가지이다. 공리주의와 나폴레옹의 권력 이념. 하나의 생명과 백 개의 생명을 맞바꾸고, 하나의 생명을 없애는 대신 수천의 생명을 구한다는 공리주의. 인류의 생사를 전제적으로 결정했던 천재적인 인물들, 이를테면 케사르, 카알 대제,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들에겐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론이다. 대신 그들은 본인들이 그렇게 비범한 존재로 태어났음에 100%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전당포 할머니를 희생함으로써 다른 많은 이들을 배불릴 수 있다. 탐욕스러운 1인의 재산을 강제로 탈취하여 생계가 위험을 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은 동양의 의적 소설에도 많이 묘사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탐욕스러운 게 나쁜 것인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탐욕가, 부자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할 것이고 절대다수의 가난한 자들은 그들에게 '욕심쟁이','이','피를 빨아먹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음으로써 파괴의 대상으로 간주할 것이다. 과연 그들의 부를 재분배 함으로써 인류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시계열을 늘려 봤을 때, 그리고 인간 본성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시적인 만족감을 준다고 하면 그것은 쾌락의 수준에 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쾌락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본다. 인류의 역사에서 태평성대는 찾아보기 힘들고 그것 또한 일부에게 한정적이며 그 기회가 싸이클을 타고 돌고 도는, 일시적인 쾌락으로 점철된 파괴와 재건의 역사라고 본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나 또한 참 운이 좋게 쾌락의 시대에 태어났고 그것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나폴레옹의 권력 이념에 따르면, 사람은 비범한 자와 평범한 자로 나뉘고, 비범한 자는 후천적인 속성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비범하다. 그는 자기 생각을 마음껏 표출하고 저지르는 데 죄의식이 없다. 철과 같이 단단한 사상이 있고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한다. 그 확신은 깊은 고민과 사색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호르몬이나 우연히 불을 지피는 사건들로 단단해지고 그러다 충동적으로 재현된다.
대부분은 생각만 하느라 기회를 놓친다. 그것의 기회비용과 파급효과 등을 따져보느라 기회를 놓쳐버릴 바에, 충동적으로 도전하는 게 성공 확률이 높다. 사실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 기준은 역사 속에서 항상 변해 왔었고, 정의라고 하는 것은 고민을 통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비범한 자가 생각해낸 정의를 추구해서, 점령하고, 물들여 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도덕이라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진화하면서 발달한 사회적 지능 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라스콜니코프는 비범한 인물이 아니다. 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떨고 있는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의 오만함은 이런 상황에 굴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범죄의 목적을 변질시켰다. 공리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본성에 승리하기 위해, 충동적인 사람이 돼보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기본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들의 특성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충동적이기 어렵다. 하지만 충동적이려고 노력한다. 그가 도박에 빠진 이유가 여기에도 있을까.
그가 품는 새로운 생각은 필연적으로 죄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태어난 시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받는 벌은, 시대를 막론한 인간 본성에 의해 선고 받는것이며,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렇게 오만하고 나약한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사랑임을 보여준다. 완벽한 사상이나 본능을 거스르는 의지가 아니라, 사랑만이 인간의 불안함을 잠재울 수 있다. 라스콜니코프보다 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마르멜라도바의 딸 소냐. 그럼에도 그녀는 인간 본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주인공에게 따뜻한 사랑을 품어줌으로써 주인공을 강박에서 벗어나게 도와준다.
이 외에도 스비드리가일로브, 마르멜라도프, 예카테리나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관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다. 하나하나 뜯어보며 많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지만, 또 다른 책에서 느껴보기로 하고 여기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