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가족여행
이번 나고야-다카야마 일정 역시 아내가 카톡에 차곡차곡 저장해 둔 wish list 중 하나를 꺼낸 거다. 2박 3일 짧은 일정이지만 1시간 반정도의 비행거리로 상대적으로 가깝고, 비행 편이나 숙박여건이 제주도보다 수월했다.
5월 국내여행은 몇 개월쯤 앞서 철저한 계획과 준비 없이는 정말 힘들다.
비 온 뒤 며칠간 괜찮더니만 영종도를 향한 도로에선 늘어난 교통량뿐 아니라 낮게 깔린 미세먼지로 엔더믹을 실감케 한다. 지난 팬데믹 3여 년간 얻은 것도 잃은 것도 많지만 깨끗했던 공기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나고야를 통해가는 다카야마는 일본중부 기후현에 위치해 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라 외부침입이 어려워 오랜 전통과 문화를 잘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산마치전통거리, 미야자와아침시장, 목제가구, 온천 등이 유명하다. 짧은 일정의 알찬 일본여행은 전통료칸에서 온천과 식사를 하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항공편과 숙박은 예약을 했지만 약 150km 거리의 나고야에서 다카야마로 가는 교통편은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알아본 바로는 JR히다지패스가 3일 여행에 가장 효율적인 교통편이었는데, 한국에서는 구입할 수 없고 현지 나고야공항이나 역에서만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혹시 좌석이 없다면 다른 대체 교통수단을 간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경험하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니 일단 부딪쳐보기로 한다.
여행은 여행을 계획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지난 뉴욕-마이애미 여행에서 움츠러든 경험을 털어버리고자 이번엔 나름 신경 써서 조사해 보았다.
짬짬이 유튜브를 통해 일본영화를 보고 구글과 네이버를 오가며 타인들의 여행 경험을 배우고 상상하고, 현장에서 겪어보는 체험은 늘 새롭고 기대된다.
도착지에서는 편안히 즐기면 되지만 가능하면 최대한 중간에 헤매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게 미션이다.
입국장 곳곳에 이민국직원의 아리가또 소리가 들려온다. 무표정하고 권위적인 미국이민국 직원들에 익숙한 큰딸은 이 낯선 풍경이 신선하게 느껴지나 보다
국제선 입국장을 나서자 두리번거리는 나를 앞질러 아내가 먼저 센트럴여행자센터를 찾았다. 마주 대한 판매원은 서툰 한국말을 섞어가며 친절한 설명과 함께 JR히다지패스 좌석표를 우리 손에 쥐어줬다.
한고비 넘겼다.
시작이 좋다.
기차로 2시간 반정도의 다카야마로 가는 길에 펼쳐진 전경은 지난 춘천의 간선도로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좀 더 한적하고 깊고 울창한 숲은 현대식 전쟁을 겪지 않은 땅의 축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꽃이 지고 순록이 피어나고 있다.
게로역 잠시 멈춰 서는 기차 안 안내판에 사슴이 선로에서 부딪쳐 지연된다는 안내문이 나온다. 자연스레 구글지도로 검색해 본다. 정말 숲이 깊은가 보다.
언뜻언뜻 보이는 히다강은 근처에 석회암이 있는지 에매랄드 빛을 비추며 굽이굽이 기차를 따라온다. JR중부선의 창문 가득한 풍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힐링이 된다. 단정한 시골집들, 빽빽한 숲, 한가로운 도로 등. 비슷하면서도 다른 일본을 나도 모르게 비교하며 살피고 있다. 가깝고 익숙하지만 워낙 오랜 역사동안 얽힌 것이 많아 쉽게 좋아하기도 어렵고, 하고 싶은 말도 다 할 수 없는 관계이다.
다카야마역의 모습은 오랜 전통도시에 대한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작지만 높은 천장이 공간감을 주면서 이 도시의 상징 같은 나무를 넉넉히 사용해 단정하고 깔끔한 인테리어가 신선했다. 제법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이다.
엘리베이터문을 열고 나선 역 앞에는 낮게 펼쳐진 두 개의 사각연못이 부드럽게 주변경관을 비추면서 우리를 기분 좋게 반겨준다.
사람과 자연을 담아내는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보인다.
애니 속 센과 치이로에서 강을 건널 땐 숨을 멈추고 건너야 무사하다고 우리도 덩달아 숨을 참아본다.
6시 체크인하는 료칸에 시간을 잘 맞추어 도착했다. 다카마야에서 제법 유명한 호쇼카쿠료칸은 외국방문객이 많이 찾는지 영어사용 가능한 인도계 종업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말은 안 통하지만 카운터에 함께 하시는 두 분의 할머니의 표정은 뭐라도 설명해주고 싶은 영락없는 노주인장의 모습이다.
안내받은 방에서 펼쳐진 다까야마 시내풍경은 부드러운 석양노을 덕에 시골 외할머니품 같이 편안하고 푸근하게 느껴진다. 도시 전체가 소박한 간판들과 나지막한 건물들로 서로 조심스럽게 어우러져있다.
졸졸졸 노천탕에 흐르는 물소리와 더불어 나무와 풀향이 섞여있는 밤공기는 달콤하기 조차 하다.
마셔도 마셔도 배부르지 않은 공기가 너무도 상쾌하다. 이 순간 감사하는 마음에 더욱 천천히 가슴 깊숙이 신선한 공기를 음미해 본다.
정성스럽게 차려진 저녁만찬은 새벽부터 종일 달려온 우리들의 여독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올망졸망 보는 즐거움에 실제 맛이 궁금해진다. 대체적으로 짠맛과 살짝 단맛이 스며있다. 역시 보는 맛이 월등하다. 큰딸 또래의 젊은 여성분이 설명을 하면서 서빙을 해주는데, 왠지 능숙해 보이진 않는다.
단단한 목재를 이용한 히다다카야마가구는 명성대로 단순하면서 정성스러운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원목의 풍부한 질감을 살리면서 절제된 가운데 유려하게 다듬어진 마무리까지 보고 있자니 오래도록 곁에 두고 쓰고 싶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은 이곳에 다 모이는 모양이다. 쉽게 볼 수 없었던 외국관광객들이 줄줄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방문객으로 여행을 할지 관광객으로 여행할지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산마치거리에서 찾아간 Cafe Ao, 그윽한 에스프레소커피 향이 미야자와아침시장에서 봤던 어느 커피상의 광고문구를 불러온다.
It is hard to find a good espresso and a wife.
운이 좋았다.
경차천국, 시내 어딜 가도 작은 차들이 대부분이다.
조심조심 서행하는 차들의 모습에서 작은 차들이 충분히 배려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경차라 주차선도 넉넉하고 도로도 넓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오랜 타지생활로 사랑에 많이 배고팠나 보다. 딸들의 허기가 쉽게 달래 지지 않는다.
도요타의 도시로 더 잘 알려진 나고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장, 일본 3대 도시 등등. 찾아보니 알게 되는 도시의 수식어인데, 며칠 만에 친해지기란 쉽지 않다. JR선과 메이테츠선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지…
50분을 기다려 자리에 앉게 된 히츠마부시 전문점 마루아 혼텐 본점은 가족 모두의 입맛을 만족시킨 맛집이었다. 몇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먹는 법을 소개해주는데, 무엇보다도 적당한 양념에 부드럽게 탄내 나는 장어맛이 일품이었다.
돌아가는 나고야역 앞, 검정 도요타크라운 일색이던 택시가 이제 흰색에 광고도 실었다. 일본도 많이 가벼워지고 있는 것 같다.
매번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나라이다. 이번에도 영어로 말을 걸면 청년이나 나이 드신 분이나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살짝 당황하고 있는 큰딸옆에서 구글번역기를 이용해 간신히 소통한다. 기술의 혜택에 감탄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정체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더 성숙해진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지는 짧은 여행으로 판단하긴 쉽지 않다.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2박 3일 짧은 시간이었지만 농축된 경험이 시간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만든다.
짧은 시간에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두나라를 오가며 다르게 살아온 문화를 맛보는 체험은 삶의 다양함을 인정하게 하는 좋은 공부다.
고슴도치가족이 고슴도치로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알면 즐거움이 따라온다.
개인이 오랜 시간 동안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모방을 통해 배우면서 인정받고, 더 나아가 객체로서 서로 존중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는 것처럼, 이 이웃나라에 대한 애증을 풀어가는데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다.
언제쯤이면 가볍게 출발한 일본여행을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제 돌아간다.
여행의 끝은 일상의 시작이다.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는 무뎌진 일상을 새롭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일상이 여행이 되는 선물이다.
여행은 함께하는 사람과 더불어 더욱 풍성해지는데, 이번 여행기가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떠날 수 없는 이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즐겁게 공유되길 조심스럽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