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순례길-힘 빼기 2
18살,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지는 질문,
나는 뭘까? 나는 누구인가?
설명도 이해도 안 되는 질문의 모호성.
한창 공부해야 할 때 쓸데없어 보이는 상념이 계속 괴롭힌다. 현실도피, 배부른 이상주의 철학적 질문은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외면받는다. 드러내면 안 되는 질문이었다. 참 재미있는 것들이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은 청춘, 마음 저편 한구석에선 늘 빤히 쳐다보는 듯한 뭔지 모를 또 다른 그 무언가가 있어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이었는데, 딱히 뭐라 할 수 없으니 던진 질문이었다.
대학진학이라는 목표로 분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더욱 선명해지는 질문, 왜 학교에서 이런 공부를 이렇듯 열심히 해야 하나? 어떤 보상이 뒤따르는 노력일까? 살아가는 기술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졸업 자격증을 얻기 위해 거쳐가야 할 관문이라고 자신을 설득한다. 그때 읽었던 나비가 되어 날고 싶은 애벌레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날고 싶은 본성의 욕구를 실현하는 두 가지 갈림길, 애벌레탑을 쌓거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고치를 뽑아내느냐. 그리고 선택. 출가는 못하겠더라.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지 정리되지 않은 채 사회적인 관계로서의 역할과 도리, 예의에 중점을 두고 그 사회의 성공모델이 제시된다. 두 점을 연결한 방향을 가진 직선을 그리려고 하는데, 한 점이 모호하다. 사실 사회적 가치관 역시 너무도 급속히 변해가고 있으니 나머지 한 점도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출발점도 목표점도 모호하니 선이 그려질 수 없다. 마치 시계초침처럼 뱅뱅 돌고 돈다. 직선을 요구하는데, 원 아닌 원을 그리고 있다.
삶의 지혜는 명심보감이면 충분하시다던 아버님말씀에 헌책방에서 구해다가 졸면서 보았던 좋으나 지루한 얘기들, 동양의 고전이라는 사서삼경은 정말 공자왈, 맹자왈이었다. 성인이 말씀하시길 블라블라블라… 천지자연의 변화하는 이치를 도형화한 점괘로 표현도 하고, 뭔가 제대로 배우기엔 너무 멀다. 한오백년 공부한 조선의 우주원리를 밝히는 성리학적 연구 역시 내겐 너무 추상적이라 나와의 연결고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원서가 한문이니 번역과 해석이 현대의 한글로 옮기시는 분들이 그 당시만 해도 엄숙하고 돌에 새겨진 공룡의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은 글이었다. 그중 그나마 숨 쉬게 하는 글은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였다. 쓸모없슴의 쓸모를 얘기하고 꿈과 현실을 하나로 풀어가는 유연한 상상력이 매력적이었다. 그래도 나라는 존재는 여전히 모호하고 현상의 설명 속에 내가 녹아들지 못하였다. 때마침 번역된 오쇼 라즈니쉬의 빈배이야기는 신선한 충격과 호기심을 자극해 일련의 출간된 책들을 마치 무협지 읽듯 읽어갔다. 단의 열풍 속에 한민족의 뿌리사상인 천부경, 환단고기도 그때 거쳐갔다. 그래도 여전히 배가 고팠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동양의 고전에 지칠 때쯤 미국유학길에서 다가온 것이 예수의 가르침, 예수교이자 그리스도교의 포교였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느냐? 아버지를 알면 나를 알 수 있겠구나.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경에 답이 있다 한다. 인류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책이고 종교개혁을 통해 거듭났고 신흥강국인 미국의 보편적 종교라고 하니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 속는 셈 치고 배워보자. 예수라는 분이 나를 위해 죽었고 나의 더러워진 옷을 당신의 새 옷으로 깨끗이 갈아입혀주신다고 하며 내게 동의를 구한다. 나는 거저 준다고 하니 한편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말로써 분명히 동의한다는 의사표현을 하면 교인이 된다고 한다. 엄청 축하를 받았지만 내 내면은 딱히 뭘 축하받을 만한지 모르겠었다. 이후엔 신흥목사의 교주놀음에 빠졌다가 식겁하여 한발 물러나 신화의 기원을 연구한 조지 캠벨교수, 법정스님이 옮기신 법구경, 고은시인이 풀어쓴 화엄경을 더듬어 가다가 찾아온 글이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였다. 잘 이해는 안 되었지만 그냥 맞는 것 같았다. 어렴풋이 길이 보인다. 길이 있긴 있구나. 그리고 가는 길이 많았구나. 그러자 다시 예수가 그 길을 앞서간 스승으로 달리 다가왔다. 거친 영혼의 순례길에서 종교에 빠지지 않으면서 종교에 몸담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곳에 수많은 사람이 갔던 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순교의 역사를 가진 한국천주교를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길을 따른 많은 성인들의 길을 더듬어 가며 그 답을 찾는데 속도를 늦추면서 순례길에 올랐다.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창조주를 믿는다고는 하는데 바티칸 벽을 가득 메운 미켈란젤로가 표현한 천지창조 속의 흰 수염의 창조주는 더더욱 실감 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이 너무나 또렷해 창조주의 다른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알면 알아갈수록 도저히 그 그림이 내 마음속의 창조주로 그려지지 않는다. 나중에 죽어서 만나 뵈면 놀랄 듯.
샛길이 너무 많다. 아차 싶으면 가는 길을 잃어버린다.
숭산스님의 선의 나침반, 토마스 머턴의 침묵 속의 만남, 동서양을 꿰는 뭔가의 길이 있을 법한데 쉽게 찾아지질 않는다. 지식으로 알아가는 길이 아니라 수행을 해야 알아지는 길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질 때 우연히 접한 토마스키팅신부님이 쓴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책이었다.
천주교에도 기도수련이라는 것이 있다니, 무척 흥미로웠다. 기도문을 외워서 읽는 것에서 기도수련, 기도수행을 얘기한다. 향심기도로 알게 된 무지의 구름, 십자가의 성요한은 나를 스페인의 세고비아까지 가게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침묵을 배워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정말 막막하다. 다행히 관상지원단 지도신부님과 씨튼수녀원 수녀님, 함께 하는 좋은 도반이 있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또한 최근 위빠싸나 수행하시는 누님이 전해주시는 매일의 수행일지와 도경스님의 담마숲강론은 양날의 칼처럼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그렇게 걸어왔던 영혼의 순례길에서 여전히 알아지지 못하는 나란 존재의 모호함이 마음 한켠에 무겁고 지루하게 계속되는 어느 순간, 자전거를 타며 힘을 써왔던 몸에 힘이 빠지고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평온한 고요로 접어드는 명료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을 기도수행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기도 중 살짝 힘이 들어갔던 의식이 놓아지고 힘이 빠지며 침묵으로 접어들고 가벼이 머문다. 힘이 들어간 포인트를 알아차린 것이다. 떠나보내는 의식의 미세한 움직임 조차 힘이 들어가 있으니 기도시간이 힘들었다. 그 힘이라는 것이 의식이고 의지이며 욕구이고 갈망이다. 거룩한 단어를 깃털처럼 떠올리라는 말이 이런 거구나. 상징화된 거룩한 단어조차 무겁다. 그 단어도 가벼이 힘을 빼고 떠나보낸다. 더 이상 거룩한 단어가 필요 없다. 상념을 떠나보내는 가벼운 의식조차도 깃털보다도 가볍게 힘을 빼고 침묵 속에 그대로 자신을 맡기는 체험이었다. 몸의 체험은 통합적이다. 한쪽이 열리면 다른 한쪽도 열리는 것이다. 바로 알아지는 그것으로 살짝 실눈을 뜨게 되어 빛을 경험을 한다.
힘이 빠진 세계가 이런 거구나.
참, 도대체 왜 그렇게 힘주고 살았던가!
잘살려고 힘을 주며 마치 힘 빼면 존재가 사라져 버릴 줄 알았는데, 힘이 들어간 상태와 힘을 빼겠다는 의지마저 사라진 순간, 여전히 힘이 빠져있는 나도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알아진다. 그리고 알아지기 이전의 묘한 갭, 찰라이지만 무한침묵의 짧은 순간, 이런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구나. 왜 언어의 한계를 알면서도 제한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 소위 에고도 참자아도 모두 하나이고 일상의 삶이 곧 실재하는 것이구나. 왜 너와 내가 하나인지 분리되지 않은 순간의 체험. 왜 산이 다시 산이고 물이 다시 물인지. 짧게 읽었던 화엄경의 십우도가 지난 40여 년의 시간으로 다시 펼쳐진다.
자전거명상은 단순하다. 리드미컬한 페달링 속에 다가오는 외부자극과 내면의 반응 그리고 상념을 오래 붙잡을 수 없다. 어떤 놀라운 장면도 달리는 자전거위에선 가볍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스님들이 좌선과 경행을 병행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무작위로 떠오르는 일상의 상념과 상념에 대한 반응에서 힘이 빠지고 가벼워지면서 덤덤한 평온과 침묵, 고요함이 마치 호수물같이 드러난다. 대단한 뭐도 아닌데 그냥 뭔가 가볍고 기분이 좋다. 질문이 생기면, 아, 궁금해하는구나. 그 순간 질문으로부터 가벼워진다.
수십 년을 품어온 질문도 그저 질문일 뿐이다.
힘이 빠지니 너무나 가볍다.
이와 같이 일상의 삶에서도 벌어지는 외부자극과 내면의 반응에 대해 힘을 빼면 되겠다고 여겨지니 살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오래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얼마 전 유발하라리교수가 쓴 호모데우스가 자극제가 되어 답을 제촉하였다. 그는 역사학자답게 인류는 무엇인가? 역사 속의 호모사피엔스와 그 연장선상의 인간과 인공지능을 비교분석하면서 호모데우스를 탄생시켰다. 서양의 유대인석학이 바라보는 인간은 쪼개고 쪼개져 없어지고 호모데우스로 거듭나는 것을 예견했다. 반면 쪼개고 비워도 충만한 인간에 대한 나의 경험을 개인사를 통해 보면서 과연 이러한 인간의 모습이 유전자와 호르몬의 작용, 뉴런의 활동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또한 그러한 체험이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이것 역시 쉽게 단정하기 어렵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인류가 미래의 우세종이 되지 말라는 법 또한 없지 않겠는가! 세상에 대가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뒤늦게 날아오는 청구서에 너무 당황하지 말도록 살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더이상 이 질문에 무게가 실리지 않지만 부족한 언어로 미뤄온 답을 해본다.
나는 그 질문과 함께 그 질문 안에 그리고 그 질문 너머에 침묵과 함께하는 통합적 경험의 총체이다.
개뿔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없다고 예수님이 말하셨다.
육신의 배고픔을 채울 빵과 영혼의 배고픔을 채울
말씀이 필요하다 하셨다. 하지만 빵도 말씀도 체화되지 않는다면 그 배고픔은 달래 지지 않는다.
이제 간신히 또 한 발 내디뎠다.
한 발 또 한 발 그렇게 가는 거다.
이 글 또한 글일 뿐이다.
흐르는 물처럼 잠시 모였다 가벼이 흘려보낸다.
이제까지 매일 부딪치는 현실의 삶과 애매한 질문의 답을 찾느라 순간순간 얼을 빼고 균형 잡지 못해 뒤뚱거리는 곁을 지켜준 아내와 딸들이 있어줘 고맙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