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있던 약국은 신경 접합 같은 미세수술을 받은 환자가 많이 입원한 병원 옆이었다. 주로 산업현장에서 일하다가 중장비나 프레스 기계에 손의 일부나 손가락이 절단되거나 다쳐서 오는 환자가 많았다. 소위 3D 현장의 환자들이 많다 보니 국적이 다양했다. 중국의 조선족에서부터 중국, 필리핀, 방글라데시, 우즈베키스탄, 몽골에 이르기까지 가히 다국적 환자 군이 늘 넘쳐났다.
약국 옆의 큰 나무 아래는 가만 보니 의료진 눈을 피해 환자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하는 장소로 쓰이는 것 같았다. 서너 명만 모여도 실컷 수다를 떠는 남자 환자들을 보며 수다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어느 날 단골 수다쟁이 환자가 약국에 들렀다. 그는 다리 수술을 해서 주로 휠체어로 움직였고 거동이 불편했다.
"늘 휠체어를 밀어주시는 밖의 저분은 누구예요? 저분도 환자 같은데."
"아, 저 뚱땡이요? 우리 6인실 환자인데 몽골 사람이에요. 손가락만 다쳤지 다른 데는 멀쩡하니까요."
"저 몽골 분은 한국말을 잘 하나 봐요?"
"우리말 전혀 못하는데요."
"아니, 아까 내내 같이 이야기했잖아요."
"아이고, 서로 답답하니 저는 몽골말로 나는 우리말로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게 무슨 이야기예요 하하."
"모르시는 말씀, 같이 지내다 보면 그럭저럭 통해요. 저 친구가 얼마나 하는 짓이 이쁘다고요. 우리 병실에 베트남 사람도 있고 저 몽골 친구도 있는데요, 사람들이 다들 저 친구에게는 빵도 사다 주고 저녁에 간식 먹자고 데리고도 나가고 해요. 한데 그 베트남에게는 그러지 않죠. 그 이전에 있던 베트남 친구는 참 괜찮았는데..."
"왜요?"
"그야 저 친구는 나 같이 몸 불편한 병실 식구들에게 늘 밥도 타서 날라다 주지 수저도 씻어주지 심부름도 알아서 눈치껏 하니 안 챙길 수가 없지요. 그 베트남 녀석은 저 혼자만 아는 녀석이라... 그나저나 뭐 시원한 드링크 몇 개 주세요. 저 친구랑 나눠먹게. 아니 하나 더, 저기 저 우즈베크에게도 줘야지."
그제야 보니 길 건너 벚나무 가로수길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백인이 보였다. 자주 그곳에 있는 것은 보았는데 늘 혼자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산재 환자였다. 일하다가 손가락이 세 개나 심하게 절단되어 접합 수술을 받았다. 수차례 재수술 후에도 기능은 다 회복하지 못했고 벌써 몇 달째 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후, 그가 처음으로 약국에 들렀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혹시 실내용 슬리퍼를 살 수 있는지 물었다. 병실에서 남는 슬리퍼를 얻었다는데 슬리퍼에 비해 발이 워낙 컸다. 슬리퍼를 신었는데도 발꿈치는 땅바닥에 닿아 있었다. 아마도 큰 맘먹고 슬리퍼를 사려고 온 모양이었다. 유창하지는 않아도 의사소통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말을 했다. 약국에는 슬리퍼가 없고 조금 아래쪽에 있는 신발 집이나 ‘천 냥 마트’에 가면 살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하지만 며칠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 작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마침 문방구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거기에 280 밀리 짜리 삼선 슬리퍼가 있어 샀다.
다음날 오후쯤 그가 보였다. 직원을 시켜서 슬리퍼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한참 후 그가 약국에 들어섰다. 슬리퍼 값을 물었다. 그것은 그냥 집에 있던 것을 가져왔으니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그는 머쓱해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얼마 후 병원에 갔다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등 뒤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보니 큰 키의 그가 서 있었다. 185센티도 넘을 것 같은 큰 키 때문에 내 머리 위로 그가 보였다. 한데 그때 가까이에서 본 그의 눈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내 지루한 터널을 지나다가 갑자기 확 나타난 푸르디푸른 바다 같다고 해야 할지. 바이칼 호수 같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렇게 깊고 아름다운 눈은 본 적이 없다. 한데 좀 슬퍼 보였다.
늘 그가 내려와 치료받는 물리치료실에 물어봤더니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산업 연수생으로 왔는데 계약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손가락을 다친 것이라고 했다. 전에 고향에서는 국어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하도 길고 복잡해서 이름의 일부분을 따서 ‘야니’라고 병원 직원들끼리 편의상 부르고 있다고 했다. 원래 이름이 야나첵 인지 안드레이 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야니’는 몇 개월을 병원에 있어도 아무도 방문하는 이가 없는 환자였다. 가끔은 우울하다고 물리치료실에도 치료받으러 내려오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는 같은 나라에서 온 그의 동료가 병문안을 왔다고 했다. 처음으로 활짝 웃으며 벤치에 앉아 오래오래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는 그를 봤다. 그 벤치 뒤로 흰 벚꽃이 만발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눈송이처럼 꽃잎이 날렸다.
약국에 볼일로 들른 그에게 ‘백만 송이 장미’ 노래를 혹시나 아는지 물었다. 녹음한 그 러시아 노래를 들려주자 그는 아주 반가워했다. 러시아의 민요란다. 가사를 알려줄 수 있느냐 물었더니 병실로 오라고 했다. 한가한 날 점심시간 짬을 내어 병실에 갔다. 육 인실의 한 침상에 무료하니 누워 있던 그가 깜짝 반가워했다. 내가 가져간 노트에 먼저 능숙한 솜씨로 러시아 알파벳을 주욱 쓰며 발음을 알려줬다. 발음 기호를 적어가며 나를 가르치는데서 국어 선생님의 관록이 묻어났다. 자신의 아내 사진도 내게 보여주었는데 아주 품위 있는 미녀였다. 그들은 아직 아이도 없는 신혼이었다.
‘야니’의 설명에 따르면 이 노래는 원래 러시아 어느 지방의 민요였는데 한 가수가 개사를 해서 불러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 가사의 내용은 우리나라에 번안해 소개된 노래의 가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장미를 좋아하는 어느 여가수를 사랑하는 한 가난한 화가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장미를 샀다. 그녀를 위한 장미를 밤새 그녀가 머문 호텔 앞 광장에 가득 채웠다. 그 가수와의 만남은 짧았고 그녀는 떠나버렸다. 그는 평생 외롭게 살았고 그 장미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것이었다는 이야기라고 대강 설명해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원곡은 가사 내용이 전혀 다른 라트비아의 가요였다. 당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어 그리 알려진 것 같다)
첫날은 러시아 알파벳을 배우고, 다음번에는 외운 알파벳을 가지고 그 노래의 가사를 보며 발음을 익혔다. 그다음엔 내가 외운 가사의 발음을 교정받을 차례였다. 한데 내가 발음이 자꾸 틀리자 그가 말했다.
"아따, 이 사람아 그것이 아니여~."
난 깜짝 놀라 내 귀를 의심했다. 입에 착 감기는 전라도 말로 구성지게 그 말을 하는 푸른 눈의 순한 서양인을 보자니 웃음이 났다. 그 말은 알고 보니 작업반장이랑 공장의 동료들에게서 익힌 말이었다. 아마도 ‘야니’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워낙 ‘야니’가 순하고 점잖으니 그들이 그 정도 말을 썼을 것이다. 그는 욕도 전혀 하지 않았으니 그저 배운 대로 입에 붙어서 쓰는 말 일 것인데. 어쨌건 내가 웃어도 그는 영문을 몰랐고 그 말을 "그게 아닙니다."의 대용으로 계속 쓰며 열심히 가르쳤다. 얼마 후 그는 퇴원을 했고 내 러시아어 수업도 끝이 났다.
전에 러시아에 미술 유학을 다녀온 후배의 말이 생각났다.
"언니, 러시아 사람들은 저녁 식탁의 음식을 줄이더라도 발레나 음악회는 가. 예술에 대한 배려랄까 그런 것을 느꼈어. 돈 같은 물질로만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어."
그 역시 이제 다시는 재입원할 일 없이 근무 기간도, 치료도 끝나서 귀국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 말처럼 산재 보상금을 많이 타서 귀국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아름다운 아내는 남편이 손에 장애를 입고 돌아온 것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다시 국어 선생님으로 복직을 해서 톨스토이나 푸쉬킨의 작품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지내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여기서 조언했던 것처럼 한국어를 좀 더 공부해서 여행사에서 한국인 관광객 가이드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이 아픈 기억보다 더 많기를 바랄 뿐. 무엇을 하건 간에 그 아름답고 선한 눈매를 가진 ‘야니’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때 배운 '백만 송이 장미' 러시아어 노래는 그 이후로 부를 일이 없어 그대로 사장되어 잊히고 말았다. 지금도 가끔씩 혼자서 우물거려보지만 후렴구만 희미하게 기억이 날 뿐이다. 그러나 ‘야니’의 그 깊고 푸른 눈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