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여름의 맛

by 시우

외삼촌과 함께 참외밭에서 함께 자던 날 어린 그는 잠이 들려는 순간 이상한 물건들이 삐걱거리듯 "뿌지직! 뿌지직!"소리를 듣는다. 겁이 난 그는 외삼촌에게 달라붙는다

"저게 무슨 소리예요? 무서워요."

외삼촌 왈 "도시에서만 자란 녀석은 할 수 없구나. 저 소릴 처음 듣냐? 저건 수박이 커지는 소리야."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을 읽다가 만난 대목이다. 수박이 커질 때 "뿌지직 뿌지직" 하는 소리가 난다니! 수박을 좋아하고 평생 먹어왔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수박이 자라는 소리라니!

비닐하우스 안에서 크는 수박에서도 이런 소리가 날까? 설령 난다 해도 전처럼 수박 밭의 원두막에서 함께 밤을 보내지 않으니 누가 이런 소리를 듣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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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즙을 듬뿍 머금으며 자라는 이 넉넉한 과일을 나는 좋아한다. 더욱이 다른 과일과는 달리 수박은 여럿이서 나눠먹어야 제 맛이다. 요즘 같은 핵가족을 넘어 일인 가구 시대에는 큰 수박은 먹고 싶어도 감당하기가 힘들어 사기가 망설여지는 과일이기도 하다. 시대에 맞춰 나온 복수박이라는 미니 수박도 있지만 그 맛은 커다랗고 탄탄한 수박을 탁 잘라먹는 그 맛에는 비할 수 없다.


어려서 동네 서리꾼들을 쫓아내려고, 또는 수박을 팔려고 지은 원두막은 참 시원했다. 친구네 원두막에 찾아가 놀기도 하고 배를 깔고 엎디어 방학 숙제를 하다가 운 좋으면 참외나 수박을 얻어먹기도 했다. 유난히도 시원했다고 기억되는 이 원두막은 여름과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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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카에 가득 쌓아두고 팔던 수박은 지금처럼 브릭스 12네 14네 하면서 당도를 측정할 수 없었지만 나름의 측정법이 다 있었다. 일단 수박을 고르면 아저씨는 수박에 삼각형 쐐기 모양의 칼집을 낸 후 쏙 뽑아서 검은 씨와 그 붉은 속살로 잘 익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데 집에 와서 잘라보면 그 쐐기로 자른 부분이 기막히게도 제일 잘 익은 부분이었다. 모든 수박 장수 아저씨들은 수박의 잘 익은 부위를 꿰뚫어 보는 투시 능력이 있나 보다 싶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수박을 그물 바구니에 매달아 샘에 차게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었다. 더운 여름날 더위에 지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커다란 쟁반에 우물에서 갓 꺼내온 수박을 좍~ 잘라서 그 붉은 속살을 손을 적셔가며 먹던 기억. 내 어렸을 적 여름의 기억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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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교생 선생님에게 들은 수박서리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난다.

친구들과 옆 동네로 수박 서리를 갔단다. 달이 구름에 가리는 캄캄한 때를 골라 일을 거행했다. 사납기로 소문난 할아버지네 수박 밭이었는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다가가다가 그만 잠귀 밝은 할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떤 놈이냐! 이 놈들 게 섰거라!" 하는 고함소리에 놀라 도망을 치는데 그래도 빈 손으로 올 수는 없어 옆의 수박을 급히 따서 줄행랑을 쳤다. 한참을 달리다가 겨우 한숨을 돌리고 친구들과 방죽 둑가에 모여 앉았다. 어두컴컴한 칠흑 같은 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래도 수박은 하나씩 들고 왔다. 짜릿함과 함께 그 수확물의 맛을 음미하며 한참 먹는데 한 녀석이 말했다.

"헌디, 내 수박은 먹을수록 맛이 영 이상혀야."

마침 구름 사이로 내민 달빛에 보니 그 녀석이 먹고 있는 것은 수박이 아니라 호박이었다나.


요즘 아이들 중에 여름 풍경으로 원두막과 수박밭을 그리는 아이는 없을 것 같다. 동화책이 아니면 원두막을 알기나 할까 싶다. 시대에 따라 여름을 느끼는 방법이 나름 많겠지만 난 외갓집 동네에 방학 때 놀러 가는 그런 고릿적 여름 이야기가 여전히 그립다.

모처럼 만나는 외삼촌과 여름 밤하늘의 은하수도 보고 북두칠성도 찾아보며 풀벌레 소리에 젖어 원두박에 누웠다가 "뿌지직 뿌지직"하는 수박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놀라는 여름은 여전히 내가 생각하는 가장 싱싱한 여름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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