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담기

시간을 숙성하다

by 시우

햇살 쪼이는 바깥 베란다에 놓은 장 항아리가 참 예쁘다. 내가 방금 담은 장항아리다. 시간을 머금으며 장이 차츰 익어갈 것이다. 이젠 자연의 작업이 남았다.


오늘 내 생애 처음 간장을 담았다. 얼마 전 우연히 본 홈쇼핑 채널에서 메주와 소금, 심지어 물까지 일습의 장 담기 세트를 판매하고 있었다. 고추장은 몇 년 전에 담아 봐서 알지만 내가 좋아하는 된장은 어떻게 만드는지 정확히 몰랐다. 물론 전통 장 담기 시연회에도 가봤고 엄마가 하는 것을 봐왔으니 그동안 내가 접한 정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귓가로 스치고 만 것이리라. 물론 내 친구 중에 간장 된장을 직접 담는 애도 없다.



어제 택배로 그 물건이 왔다. 미니 메주가 6개 물이 10리터, 소금 한 봉지, 붉은 건고추 세 개, 숯 세 조각이 플라스틱 통과 함께 배달되었다. 막상 장을 담으려고 보니 플라스틱 통보다는 항아리가 낫고 우리 집의 베란다보다는 햇볕 좋은 동생네 야외 베란다가 나을 거 같았다.


엄마가 쓰시던 항아리 잘 씻어두라고 어제 당부를 하고 오늘 메주를 들고 갔다. 전에 본 기억에 따르면 볏짚을 태워 항아리 소독을 해내야 했으나 구할 수 없었다. 생각 끝에 집에 있던 40도짜리 고량주를 따서 항아리 내부를 소독해내고 다시 헹군 다음 장을 담았다. 과정 자체는 생각보다는 너무 간단했다. 기본적으로 소금물 농도를 맞춰서 메주를 넣은 항아리에 정량대로 부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나중에 45~60일 후에 장을 가르면 간장과 된장이 되는 거다.


요즘은 자꾸 시공간이 헷갈리시는지 "이제 곧 설이 되니 설 쇠러 우리 집에 가야겠다."라고 하시는 엄마께 이것저것을 부러 물었다.

"엄마, 항아리가 여러 개인데 어떤 것이 엄마가 말한 장이 맛있는 항아리야?"

"어디 항아리가 있냐?"

"항아리야 엄마가 쓰시던 이층의 베란다에 있잖아."

"여기가 우리 집이냐?"

"그럼, 엄마가 이십 년을 사시고도 몰라? 나랑 이층에 가서 좀 알려줘. 내가 장을 담아보려고."

이층으로 올라가신 엄마는 여기저기 둘러보시더니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가구를 보니 그런 것 같구나. 한데 항아리는 통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장은 정월에 담았던 거 같은데..."


작은 항아리에 장 담기를 마친 다음 엄마에게 장을 담았다고 하니 다시 물으신다.

"계란을 띄워서 염도도 맞추고 고추도 띄웠냐? 숯도 넣었고? 숯은 불에 달궈서 넣어야 하는데."

나 어려서 살던 40년 전의 친정집만을 자신의 집이라고 기억하시며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우기시는 엄마가 장 담는 것은 긴가민가 하시면서도 정확히 기억해내신다.



쓰러지시기 전까지 엄마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직접 담으셨다. 메주를 집에서 띄우기 힘들게 되자 장 담는 양도 확 줄었고, 메주를 사서 쓰셨지만 엄마가 담은 간장 된장은 참 맛있었다. 엄마의 된장보다 더 맛있는 된장은 아직 그 어디서도 맛본 적이 없다. 유명하다는 된장을 섭렵해봤지만 그 맛이 아니었다. 엄마 말씀으로는 항아리가 맛있어서 그렇다고 하셨다. 전에 할머니가 쓰시던 항아리를 물려받은 것이지만 할머니가 장을 담던 모습은 내 기억에는 흐릿할 뿐이다. 고추장이야 담아서 단지에 넣기 전에 대청에 놓고 수시로 저어주며 하루 이틀을 묵혔으므로 기억에 남지만.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엄마의 말씀이 다 옳다. 장은 섣달인 지금이 아니라 설 쇠고 정월에 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날도 뱀날은 절대 피하고 말날, 손 없는 날에 담는 거란다.

난 아직도 달력에 표시된 12지 동물이 그려진 날의 의미를 잘 모른다. 하지만 말날이라는 게 말일이 아니라 말이 그려진 날이라는 것도, 손 없는 날이 무슨 의미인지도 다시 짚어보게 되었다. 손이란 Hand가 아니라 사방으로 다니며 해를 끼치는 잡귀를 말하는 것으로 음력으로 끝자리가 0이나 9로 끝나는 날이 손 없는 날이란다. 즉 잡귀의 방해를 받지 않는 안전한 날을 말하는 것으로 민간신앙에서 유래된 거다.


제대로 하려면 설이 지난 추운 날 손 없는 말날을 택해서 장을 담아야 한단다. 그러나 춥기는커녕 소한이 지나고 대한이 가까이 와도 추워질 줄 모르는 금년 겨울인 데다가 귀신도 돈에 따라왔다 갔다 하는 시대에 손 없는 날을 따지는 것도 별 의미 없어 보인다.

오늘은 말날이 아닌 쥐 날이고 손 없는 날도 아니다.



그러나 반짝이는 내 작은 장 항아리에 마음이 가면서 슬쩍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음 달 다시 정월 추운 때(설마 이대로 겨울이 가지는 않겠지?), 말날, 손 없는 날을 택해서 다시 메주로 장을 한 번 담아볼까? 그래서 장맛을 한 번 비교해봐?'

이러다가 내일쯤 보오메 비중계를 주문할지도 모르겠다. 장 담기에 최적이라는 염도 18을 정확히 맞춰볼 욕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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