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을 볶으며
심심해서 주전부리를 찾다가 마침 뒷 베란다에 보관해둔 땅콩 자루가 생각났다. 얼마 전 동생이 땅콩 농사 지은 지인에게 받은 거라며 나눠준 것이다.
농부의 손은 늘 크다. 동생이 받은 것에서 반쯤 나눠 받은 것인데도 상당히 많다. 앞으로 겨울까지 먹을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먹는 땅콩이 볶은 것이라는 것을 안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당시는 저녁이면 번화가 길가에는 카바이드 불을 켜고 수레에 가득 땅콩을 싣고 파는 땅콩 장수가 있었다. 폐지로 접은 고깔 모양의 봉지에 한 홉 정도씩을 담아 팔았다. 퇴근길 가족을 위해서나 모임의 간식거리로 한 됫박씩을 사기도 했다.
난 집에서도 쉽게 볶아먹는 콩보다 더 연하고 고소한 땅콩을 좋아했지만 그리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봄, 텃밭에 파종을 하는 할아버지께 우리도 이번에는 땅콩을 심자고 말씀드렸다. 내가 먹는 땅콩은 볶은 거라 심을 수 없다시더니 생땅콩을 구해 심어주셨다.
처음 길러보는 땅콩이라 호기심으로 매일 텃밭에 나가 지켜봤다. 얼마 후, 집에서 흔히 보던 강낭콩이나 완두 콩과는 확실히 다른 모양의 싹이 올라오더니 쑥쑥 잘 자랐다. 완두콩 꽃과 모양이 꼭 같은 노란 꽃도 피었다. 이제 꽃이 지면 곧 꼬투리가 열리겠거니 기대하고 아침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콩 꼬투리는 열리지 않았다. 잎만 무성할 뿐인 이 땅콩은 우리 집 토질과 안 맞나 보다 생각하고 더 이상은 흥미를 잃어 이내 잊고 말았다.
여름도 다 간 어느 날 할아버지는 내게 땅콩을 뽑자고 하셨다. 이제 쓸모없는 콩 덤불을 뽑아버리는구나 싶었다. 후북하니 자란 커다란 포기를 동생과 함께 힘껏 잡아 뽑아내는 순간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뽑아낸 뿌리에 피땅콩이 더래더래 달려 있었다. 저렇게 많은 콩이 다른 콩처럼 줄기가 아닌 땅속에 열리는구나! 왜 이름이 땅콩인지 곧바로 이해가 되었다.
뿌리, 엄밀히 말하자면 땅속줄기에 잔뜩 매달린 피콩을 따서 물에 씻어 널어 말리면서 어찌나 신비롭고 오지고 신났던지. 그동안 무시했던 땅콩 포기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땅콩 자루에서 한 됫박을 덜어와 함부로 쓰는 웍에 넣고 볶기 시작한다. 껍질째 있는 피땅콩은 볶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부엌에서 일을 하는 사이 간간이 저어준다. 껍질을 까서 볶으면 쉽지만 껍질을 까는 것은 일이 된다. 또 두었다 먹어도 피땅콩이 덜 눅눅해져서 보관하기도 좋다. 땅콩은 이야기하면서 먹다 보면 조금만 먹어도 속이 느끼해지기 쉬운데 식구들끼리 앉아서 볶은 피땅콩을 서나서나 이야기하며 까먹는 것은 급히 먹을 일도 없어 좋다. 피땅콩을 까서 나온 두 알의 땅콩 중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담아두며.
몇 해 전 북인도를 여행할 때였다. 예전의 우리처럼 종이로 접은 작은 고깔을 탑처럼 높이 쌓아 좌판에 꽂고 땅콩을 파는 유쾌한 상인을 길가에서 만났다. 마침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던 중이었다. 시간도 넉넉하겠다 호기심에서 다가갔더니 두말할 것도 없이 고깔 하나를 빼어들어 넘칠 만큼 수북하니 땅콩을 담아 건넨다. 유쾌한 말과 몸짓에 미소까지 곁들여. 우리 것보다는 훨씬 작은 그 땅콩 맛은 내가 이제껏 먹어본 땅콩 중에 최고였다. 그 후 제주도에서 그 비슷한 우도 땅콩을 만난 적이 있으나 맛은 그만 못했다.
틱낫한 스님은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이 꽃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요소들,햇빛, 구름, 토양, 씨앗, 비료, 농부…….그 모든 것의 흔적을 음미하며 모든 것이 연결된 존재임을 느낀다고 말한다.
땅콩을 볶으며 나는 그 스님처럼 대단한 명상의 경지는 아닐지라도 유년의 나, 할아버지, 겨울철 카바이드 불빛을 켠 수레가 있던 거리의 풍경, 가을 햇살과 땅콩 포기에서 나던 흙 내음, 인도의 작은 거리 등등을 생각한다. 내게 땅콩은 한 봉지에 얼마짜리 상품만은 아니다.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일상의 마주침에 깃들인 이런 작은 기억과 그 안에서 만나는 섬세한 느낌과 시간의 폭이 아닐까. 편리함이나 능률을 따지고 신속 정확함에 길들여지면 만나기 힘든 소소한 기억들의 가치. 10년을 차로 지나칠 때는 보지 못했는데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니면서야 만나게 되는 사물이나 풍경, 그리고 그 안의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요즘 시간을 물 쓰듯이 쓰는 부자가 된 내가 거두는 수확물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