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마켓에는 없는 것

시장에만 있는 것

by 시우


"아고, 아직도 아기 호박이 더래더래 달려 있는데. 아까워라."

"그러게 말요. 갸들도 때를 잘못 타고나서 그렇제. 서리를 맞으니 잎이 다 잇쳐져서. 이것도 이제 마지막이여. 국 끓여봐 맛낭게. 두 단에 삼천 원이여"

"두 단은 좀 많은데... 주세요."

새벽 도깨비시장에서 호박 순을 꺾어와 파는 아주머니와 나와의 대화다.


입동인 오늘 새벽 시장에는 이제 서리를 맞아 걷어내는 호박 순 묶음이 몇 단 나와 있었다. 전에 우리 집에서도 서리 올 때쯤이면 뜰의 호박 넝쿨을 걷어냈다. 그때 나온 어린 호박 순이랑 채 자라지 못한 애기 호박을 부셔 넣고 쌀뜨물을 톱톱하니 받아 된장국을 끓이면 구수하고 맛이 있었다. 그때 그 맛이 생각나서 호박순을 두 단이나 사고 말았다. 내가 엄마의 맛을 재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거도 같이 넣어서 끓이면 더 맛나."라며 팔려고 했던지 작은 바구니에 담아뒀던 계란만 한 새끼 호박 한 무덤을 덤으로 주신다.


새벽 시장에는 계절이 펄펄 살아있다. 김장철을 앞두고 나온 쪽파, 무, 배추에서부터 밤, 생강, 토란, 표고버섯, 풋 팥, 각종 콩, 미꾸라지, 살진 암게가 싱싱하고 푸짐하다.

호랑이 콩 비슷하니 크고 둥근데 파스텔 톤의 색색이 예쁜 콩을 놓고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아유, 콩 색이 참 예쁘네, 이게 무슨 콩이에요?"

"나도 이름은 몰라, 집에다 심었는데 밥에 놔 먹어보니께 맛나. 한 번 사가서 잡숴봐."

오천 원을 주고 한 보시기를 사 담으며 난 동화책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그런 요술 콩이 이렇게 예뻣을까 혼자 상상해본다.


한쪽에서는 게를 팔고 있다. 게 발에 붙은 그물망을 연신 떼어내는 상인의 손아귀에서 꽃게는 빠져나오려고 다리를 펄떡이며 안간힘을 쓴다. 게의 처지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제철이라 알이 꽉 차 싱싱한 암게를 보니 꽃게 찌개를 좋아하는 식구들이 생각나서 그 앞에 멈춰 선다.

얼마 전 펄펄 살아있는 꽃게를 손질하며 진저리를 친 적이 있다. 그때 '내 다시는 이런 살생은 안 해야지.' 싶었는데.

그 앞에서 망설이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슬쩍 내 등을 밀어낸다.

유난히 애호박 꽃게 찌개를 좋아하는 그에게 지난번 "아무리 식재료라 해도 생물을 손질할 때는 영 마음이 안 좋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꽃게가 알이 꽉 차서 참 맛있을 건데. 당신 좋아하잖아."

"안 먹어도 돼. 안 사길 잘했어."

꽃게는 건너뛰고 싱싱한 섬초랑 가을 아욱과 풋팥, 단감, 접 마늘 등등을 사서 집으로 온다.

아마 마트에 나온 냉동 게라면 난 서슴없이 집어 들었을 것이다.

마트에서는 그저 식재료로만 보이던 것이 시장에서는 나와 같은 생명을 지닌 식물과 동물로 보인다. 모든 게 내가 몸 담은 자연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식탁에 앉아 장 봐온 것을 손질하며 대형마트에 길들여지느라 눈여겨보지 못하고 잊혔던 것들을 생각해본다.

새벽 시장에 가면서 본 빨강 노랑 단풍으로 물든 가로수길, 수확한 농산물을 팔려고 새벽차를 타고 나섰을 농부, 두툼한 옷을 껴입고 앉은 상인들과 초라한 보따리를 풀어 좌판을 벌인 노인, 식구들의 밥상에 올리려고 새벽장에 나온 주부, 중간상을 하는 새벽 시장 전문 상인, 현찰만이 오가는 재래식 거래, 왁자지껄한 시장의 소음, 거기에다 일찍 냇가에 아침 거리를 찾아 나온 백로나 왜가리까지.


새벽 장을 보고 돌아온 날 아침, 나는 계절의 숨결이 저 밑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내 부엌까지 섬세한 박동으로 이어진 것을 느낀다. 때론 날것 그대로라 촌스럽고 불편해도 거기에서만 만나지는 것들이 있다.

만추의 계절, 부엌에 앉아 제철 채소를 다듬으며 곁에 바짝 다가온 입동의 기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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