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 치고, 가재 잡고
가만히 입 안에 굴려보면 기분 좋은 단어들이 있다. 햇살, 신록, 우체국, 문방구, 서점, 찻집, 숲, 도서관, 빵집, 시냇물, 친구, 엽서 등등. 만만하고 친근해서 마음이 환해지는 말들.
학교 앞 문구점이나 시내의 노트사가 전부였던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대형 문구점이 있어 몇 시간을 봐도 못다 볼 다양한 문구가 전시되어 있다. 펜시 제품에서부터 각종 필기구, 종이, 미술 용구... 그야말로 학용품의 천국쯤 되어 보인다. 다행히도 이런 곳에서는 주머니 사정을 살피지 않고 맘껏 과소비를 해도 무리가 없다는 점이 즐겁다. 한데 갈수록 책상 앞에서 필기를 할 일은 없어지는데 나를 유혹하는 물품은 더 많아져서 문제다.
책상 몇 개를 정리하다 보니 안 쓴 문구류가 한 보따리 쏟아져 나왔다. 예뻐서, 질이 너무 좋아서, 제본이 독특해서 등등의 구실로 사 모은 노트가 수십 권, 각종 연필, 색연필, 다양한 펜 종류, 뭘 얼마나 하겠다고 박스로 사둔 4B연필에 지우개까지. 스케치북만도 몇 권에다 수채화 용지 묶음까지, 각양각색 스테이플러 그리고 집게류 등등 어디 간단한 문구점을 차려도 될 만큼이나 버라이어티하고 양이 많다. 아들, 딸 그리고 내가 다년간 사들인 결과일 것이다.
한데 아이들은 이미 휴대폰과 노트북, 태블릿 피시로 넘어간 세대고, 정서적 또는 기술적으로 아직 제자리에 머무는 내게야 아직 귀한 것들이지만 한 개 쓸 때 열 개를 사들인 셈이니 이것을 언제 어떻게 다 쓸 것인가. 요즘 시대에 문구류는 어디 선물을 해도 환영받을 품목은 아닌듯하다.
일기장으로 써도 나 죽기 전에는 다 못쓸 분량이다. 햇살이 비치는 책상 앞에 종이와 맘에 드는 펜을 놓고 앉았을 때의 그 뿌듯한 충만함을 느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데 말이다. 누군가 이것들로 열심히 공부했다면 크게 이루고도 남았겠구먼 내 서랍 속에서 제 가치를 발휘 못하고 있었겠다 싶으니 이 아이들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다.
어려서 초등학교 우리 교실 바닥은 옹이가 박힌 마루판이었다. 마루 바닥에는 큰 옹이가 빠진 구멍이 듬성듬성 있어서 반절 정도 닳은 지우개나 몽당연필이 빠지곤 했다. 잃어버린 학용품 때문에 청소시간에 벌어진 틈새로 마루 밑을 바라보며 아쉬워했다. 어쩌다 소사 아저씨가 봄 대청소 때 마루 밑을 치울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풍족하지 않아서 아쉽고 귀하던 시절이 그리 오래 전이 아닌데.
전에 연필과 볼펜을 몽땅 챙겨 가지고 인도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처음 갔을 때 우르르 달려들어 손을 내미는 아이들에게 돈 대신 연필을 주면 어떨까 싶어 다음번 방문 때 지니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남겨오고 말았다. 사람 코 앞에서 그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마구 사진을 찍는 것이 무례하고 오만한 짓 같아 인물 사진도 못 찍는 내 주변머리로는 연필을 나눠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골을 여행할 때 만나는 학생들이나 동네의 아이들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연필이나 볼펜을 나누기도 했을 뿐이다.
여하튼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생각 끝에 내 소유가 된 문방구에게 미안하지 않을 정도는 해야지 싶은 핑계로 시작하기로 한 것이 있다. 드로잉과 필사를 시작하기로 맘먹었다. '까짓, 그게 얼마나 소모된다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냥 열심히, 좋은 핑계를 삼아 하기로 맘먹었다.
전에 손으로 베끼는 것이 번거로워 에버노트나 구글 앱을 사용해서 읽던 책의 글귀를 찍어서 보관하곤 했는데 다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베껴두기로 한 것이다. 내 특유의 악필도 고칠 겸 수행하는 맘으로 사각거리는 손글씨 맛을 볼 생각이다. 또 몇 년 전 시작했지만 목디스크, 코로나를 핑계 삼아 레슨도 중도 하차하고 나서는 도무지 늘지 않는 그림을 다시 시작하는 의미로 꾸준히 하루 한 컷 이상 그려나가기로 했다.
이제 시간도 많겠다, 종이도 필기구도 이렇게 많으니 못한다면 게으름이나 맘이 없는 것일 것이니. 게다가 필사나 그림은 나이 들어 수전증이나 오면 몰라도 혼자서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돈 줍고 꿩 먹고 알 먹고다. 문방구 정리하다가 혼자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까지 얻었으니 감사한데 이 작심삼일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겠다. 삼일마다 작심을 해야 할지 함께할 동료를 구해야 할지 간만에 즐거운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