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향기가 흩날리고 밤새 소쩍새가 울어재끼는 것을 보니 확실한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오늘은 아침 창문을 여니 마치 장마철인 듯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끼쳐 들기까지 하니 여름도 급하게 다가오려나 싶다.
장에 나가보면 마트 매대의 과일도 이미 여름 과일로 바뀌어가고 있다.
전에 아이들 시험 문제에 제철 과일 찾기 시험 문제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별일이다 했는데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전처럼 햇빛과 계절에 의지해서 나오는 농작물이 죄다 시설재배로 바뀐 지 오래다. 비싼 기름을 때 가며 농사지어서 제철보다 먼저 나오고, 정작 제철이 다가오면 종적을 감추는 시대 탓이다. 뭐하러 구태여 한철 빨리 먹으려고 비싸게 인위적인 재배를 하나 싶지만 내가 모르는 농업의 경제 같은 것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전처럼 봄이면 딸기밭으로 여름이면 포도밭으로 놀러 가서 평상이나 원두막에서 소쿠리째 근으로 사서 여럿이 나눠먹으며 야유회를 대신하던 때는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참외는 이미 한창이고 한여름 과일인 수박도 재래시장에서도 차로 싣고 나와 "당도 보장. 할인 판매"를 외치는 것을 보니 가격도 많이 내려갔겠다 싶다. 겨울에도 수박은 늘 대형마트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값이 만만치 않아 일반 가정에서 겨울에 수박을 평소에 사 먹는 일은 드물다. 한데 그런 수박을 이번 초봄에 동네 미용실에서 만나게 된 일이 있었다.
동네 미용실에 머리를 다듬으러 간 날이었다. 내 차례가 와서 막 커트를 시작하려는데 허름한 할머니 한 분이 수박을 한 덩이 들고 와서는 대뜸 놓고 가시는 것이다.
"이거 두고 먹어."
"이게 웬 거래요?... 아이고, 이러지 마셔."
"아녀, 고마운 내 맘 표시여."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이러신대. 게다가 이 비싼 수박을. 가지고 가셔서 두고 드셔요."
"되얐어. 암말 말어. 고마워."
"저 이러시면 이제부터 돈 받을 거예요. 이러지 마셔요. 이웃지간에."
이러는 사이 할머니는 연신 손사래를 치며 급히 사라지고 말았다.
동네 사시는 할머니신데 얼마 전 녹내장 수술을 해서 머리를 못 감으신다는 말을 들었단다. 평소 고객은 아니지만 잠깐 미용실에 들어오시라고 해서 머리를 감겨드렸다는 것이다. 하도 시원해하시는 것을 보고 매일 오시라고 해서 몇 차례 머리를 감겨드렸는데 오늘 그 보답으로 수박을 사서 두고 가신 것이다. 본인의 감사함을 한껏 표하고 싶어 일부러 본인의 주머니 사정보다 좀 과해 보이는 수박으로 정하신 것 아닌가 싶다.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제철 아닌 수박을 사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할머니의 특별한 수박.
귀하신 수박을 선택해서 무겁게 들고 오신 그 할머니의 마음도, 이러지 마시라고 밖에까지 나가서 만류하는 미용실 원장님도 보기에 좋았다.
커트가 끝나고, 좀 있다가 수박 한쪽씩 드시고 가라는 말을 뒤로하고 나오며 아직은 쌀쌀했던 밖의 봄바람조차 훈훈하게 느껴졌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