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만난 올림픽
1992년 하계 올림픽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던 때였다. 당시 우리, 정확히는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엄마는 미국 동부의 어느 도시 중국음식점 원탁에 앉아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나와 남편은 미국에 있었다. 엄마는 우리를 보려고 잠시 오셨고 겸사겸사 엄마랑 LA 한인 여행사의 단체 관광에 나선 터였다. 관절이 나쁜 엄마를 위해 일정이 좀 느슨한 상품을 골랐다. 여행상품은 LA에서 출발해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하고 동부로 죽 내려오며 관광지를 둘러보는 코스였다.
그런데 여행이 막바지에 달한 그날 우리 여행팀의 분위기는 불평불만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전날 일정이 온통 어긋나서 숙소 도착 시간이 10시를 훌쩍 넘긴 데다가 관광가이드(혹은 여행사)의 실수로 예약 숙소 컨펌을 안 해 호텔에 도착했으나 우리가 묵을 방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이었다. 엉망인 일정에다 숙소까지 어그러지자 대부분이 중년인 관광객들의 피곤함과 불평은 극에 달해
"이게 뭐야, 달빛 관광단에다 노숙 관광단인가? 내 평생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일세"라는 말이 나왔다.
결국 한 시간 이상 로비에서 기다리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근처의 호텔에 팀을 나누어 자게 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잠을 설친 후 그다음 날 일정도 뭔가가 잘 안 풀려 껄끄럽게 흘렀다. 우리 역시 불쾌하고 짜증이 난 상태였다.
미국 교민들은 냉정했다. 가이드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용서를 빌었으나 "그는 팁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 팁을 주지 말자"는 분위기로 흘렀다. 여행사에 손해배상 청구 안 하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식이었다(미국에서 가이드 팁은 말 그대로 봉사료라서 여행이 끝난 후에 지불했다. 서비스가 맘에 들면 기본 이상의 금액을 지불하기도 하지만 아닐 때는 얄작 없는 거 같았다. )
여행 일정의 막바지에 식사를 하러 들른 그 중국 음식점에는 TV가 켜져 있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올림픽 기간에도 뉴스 시간에 자국민 메달 소식이나 간단히 전할뿐 올림픽 소식이나 중계는 따로 유료 스포츠 채널을 통해 보는 거 같았다.
아무튼 그날 지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TV에 선명한 태극마크를 단 한국 마라톤 선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KBS도 MBC도 아닌데 웬일? 다들 웅성거리며 시선이 TV에 쏠렸다.
그날은 몬트리올 올림픽 마지막 날로 폐막식을 앞두고 마라톤 경기가 중계되는 중이었다. 폐막식의 정점인 마라톤에서 결승점을 앞두고 선두로 뛰며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선수는 우리나라의 황영조 선수였다. "코리아의 황영조 선수"가 계속 선두에서 뛰더니 드디어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그 음식점은 우리 일행들의 응원으로 이미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여서 금메달이 확정되자 다들 일어나 "만세!"를 외쳤다. 메달 시상식 때 이국 땅에서 우리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나도 가슴이 뜨겁더니 울컥했다. 환호성 속에 여기가 미국인지 한국의 우리 집 안방 인지도 구분이 안 되었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 일행의 그 환호성을 다른 테이블의 현지인들도 웃으며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우리의 어리바리하면서도 영리한 가이드는 그 틈에 우리 대한민국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에다 사죄하는 뜻에서 자기가 크게 한 턱을 쏘겠다고 하며 술을 돌렸다. 테이블마다 돌며 "어머님, 아버님 하며 술을 권하고 다니는 그가 아마도 중년의 교민들에게 이제는 같이 타국에 이민 와서 고생하는 동포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너 나가 없이 대한민국으로 하나가 된 그 열기 속에서 모든 게 녹아버렸다. 서로 건배하며 마시고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훈훈한 동포애가 감돌고 서로들 이야기꽃이 피었다. 오랜 이국생활에서 중년의 교민들은 감동이 더하지 싶었다.
물론 그 가이드는 제 몫의 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혹시 아는가? 누군가 기분파가 있어 두둑한 팁을 따로 건넸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