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우 Oct 12. 2021

커피

"커피"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서양 문화로 대표되는 이 커피라는 것을 들어는 봤어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었는데 엄마 따라가서 본 "식모 삼 형제"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 영화의 트로이카라는 '문희' '고은아' '남정님'이 남의 집 식모로 나오는 코믹한 영화였다.     

친구들이 놀러 오자 주인집 사모님이 시골에서 막 올라온 식모에게 "얘야 손님 오셨으니 커피 내오렴."이라고 우아하게 말한다. 촌스럽지만 절대 기가 죽지 않는 식모는

'뭐야 코피인지 뭔지 뭘 어떻게 허라는 거여?'하고 한참을 뒨전거리더니 묻는다.

"저 커피가 뭐람요?"

"얘도 참, 거 서양 사람들 식사 후에 마시는 것 있잖니, 우리 숭늉처럼."

"아, 서양 숭늉이요."

커다란 양은솥에 물을 팔팔 끓인 다음 숭늉 끓이듯 커피가루를 털어 넣어 국자로 휘휘 저어서 맛을 본다.

'참 서울 사람들은 유별나네. 이 쓰디쓴 코피를 뭐가 맛나다고 먹는디야? 옜다 모르겠다, 달라면 줘야지' 라며 한 대접씩 넉넉히 퍼 담아 두레상을 내간다.     

그때 내가 본 "검은색 음료, 작은 사기 잔에 마시고 맛은 찡그릴 만큼 쓴 서양 후식. 좀 있는 서울 사람들이 마시는 서양 음료."가 내가 처음 접한 커피의 이미지였다.  


중고등 학교 때 동네마다 돌아다니던 미제 장수 아줌마가 가지고 다니는 주요 품목에는 늘 초이스 봉지 커피가 있었다. 그때 신문에는 "모 다방에서 담배꽁초로 가짜 커피를 만들어서 판매하다가 적발되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실렸다. 그 시절 다방에서는 올림머리에 부풀린 한복 치마꼬리를 맵시 나게 휘어감은 얼굴 마담과 레지(혹시 레이디가 변형된 단어가 아닌가 싶다)들이 있었는데 아침 일찍 가는 손님에게는 커피를 시키면 계란 반숙을 서비스로 주곤 했다. 때론 뜨거운 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주기도 했다.

     

70년대에 이르러서 국산 맥스웰하우스 가루커피가 유행이었고 자취하던 우리도 작은 병을 하나 사놓고 아껴 먹었다. 대학 시험기간에 졸음을 쫓을 목적으로 진한 커피를 몇 잔씩 마셨지만 내겐 수면제나 다름없었다. 

병원 약국 근무 시절 아침에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이 커피 한 잔이었다. 출근 시간 즈음에는 대형 전기포트에 물이 설설 끓고 있었고 가운으로 갈아입고 나오면 아르바이트 직원이 커피 두 스푼에 프림 설탕을 넣어 우리 수대로 커피를 내왔는데 당시 약국장님의 커피에는 설탕을 두어 수저 더 넣었다. 너무 달지 않겠느냐 물으니 그녀는 "국장님이 '커피는 단맛에 마신다.'라고 하세요."라며 혀를 쏙 내밀던 기억이 난다. 무슨 보약을 마시듯 점심 후에도 종종 쉬는 시간에도 우리는 수시로 그 프림 커피를 고소하고 향기로워하며 마셔댔다. 점심시간에도 병원 앞의 분식집에서 150원짜리 가락국수를 먹고 그 옆의 유명한 커피집에서 300원짜리 사이펀 커피를 내려 마시며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던 때였다.


결혼 후에 보니 미국 이민 간 시누이는 가끔씩 귀국 때마다 테이스터스 초이스 봉지 커피를 잔뜩 가져왔다. 미국 여행 후나 일반 선물로 주부들 간에는 이 덕용 봉지커피처럼 생색이 나고 만만한 것이 없어서 시어머니가 부탁한 것이었을 것이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것이, 이십여 년 전 만 해도 이 봉지 커피가 유용했지만 그 얼마 후부터 이것은 정말 촌스럽기 짝이 없고 시대감각이 뒤떨어지는 선물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물론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같은 품질의 커피를 살 수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젠 원두를 마시는 것과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는 것은 격을 달리 하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커피 원두의 원산지와 로스팅 상태와 시간을 살피는 단계까지 왔다. 격을 따지자면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데도 따지는 게 한이 없다.


직장도 관두고 시골집에서 살 때, 난 아침마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렸다. 아침 나 홀로 커다란 거실에서 통유리로 쏟아지는 햇살을 쪼이며 나른히 쉬고 있을 때 집안 가득 퍼지는 원두 향기만큼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도 없었다. 심심해서, 손님이 와서, 햇살이 좋아서, 비가 와서, 음악이 좋아서... 커피를 내릴 이유는 백가지도 넘었다. 물론 잎차도 좋아하지만 그 향기나 맛에서 커피를 따라가긴 어려웠다.      


한데 그 후 다시 약국 개업을 하고 나서 언제부터인지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떤 때는 꼬박 새벽까지 깨어 있어야 했다. 커피가 문제였다. 마실 차의 종류는 커피 외에도 많았으므로 난 오후 커피를 끊었다.

한데 그럴수록 정말 자꾸만 커피가 마시고 싶은 것이었다. 입이 아니라 머릿속에 이 커피에 대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고 커피를 아무리 들이켜도 이 갈급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봤다. 커피는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차의 대명사였을 뿐, 진짜 내가 원한 것은 커피로 대표되는 한가한 휴식과 사람들과의 교류 그리고 변화였다. 눈가리개를 한 마차 끄는 말처럼 앞만 보고 늘 꼭 같은 일상에 지쳐가는 내가 보였다. 난 넉넉한 휴식과 사람들과의 소통을 원하고 있었다.     


요즘 들불처럼 골목까지 번지는 커피집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나처럼 마음의 휴식과 사람 사이의 소통, 그리고 변화가 그리운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전에 어떤 세미나에 참가해서 단체 숙식을 하며 한 일주일 지낼 때 어떤 중년의 남자분이 더치커피를 몇 병이나 내려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는 무슨 종교의식처럼 경건하게 아침마다 그 커피를 희석해서 우리에게 내는 그분을 보고 경이롭게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유 의견 발표 시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커피는 혁명입니다!" 

순간 좀 뜨악했지만 직장에서 노조를 이끌어가는 일원인 그분의 일장 연설은 감명 깊었다.

"술은 취기로 정신을 흐리게 하지만 커피는 각성 효과로 오히려 명료한 정신 상태를 만들어줍니다. 한편으로는 약간 들뜬 흥분감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서로 대화를 나누도록 해줍니다. 커피는 기호식품이기 이전에 문화적 향유의 대상이며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의 커피 혁명론은 그날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피치였다.

실제로, 다사다난한 이 시대에 이 커피 가게가 초창기의 그 커피숍의 역할을 해줄 수는 없는 것인지... 하는 마음으로 난 지켜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신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