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푸른 가을날.
머리에 흰색이나 청색 머리띠를 하고 운동복 차림으로 등교하자면 멀리서부터 보이던 만국기! 지금은 주유소나 신장개업하는 가게 앞에까지 시도 때도 없이 늘어진 게 만국기지만, 국민학교 운동회 때 사나흘 전부터 운동장에 걸린 만국기는 특별한 날의 상징이었다. 그 만국기를 보면 어찌 그리도 가슴이 설레고 힘이 솟으며 흐뭇했던지. 생전 울리지 않던 학교 스피커에 '스와니 강물'이나 '행진곡' 따위가 아침부터 우렁차게 울리는 것 역시 그날이 보통날이 아니란 증거였다. 근 한 달 전부터 먼지를 뒤집어쓰며 연습한 마스게임이나 곤봉체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그때만 해도 시골이건 도시건 학교 운동회는 동네잔치일 때였다. 학교 소사 아저씨랑 동네 장정들이 전날 미리 쳐놓은 흰 차일 아래에는 마을 어르신들이랑 관계자가 잔뜩 앉아있고 어떻게 알고 모여 드는지 우리에게는 천국 같았던 불량식품을 잔뜩 실은 손수레가 학교 입구에서부터 운동장 가에까지 입성해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미 콩주머니(일본말인 '오재미'라고 불렀었다)를 개인당 몇 개씩 학교에다 만들어 냈고 그 덕에 높이 걸린 대바구니에 콩 주머니 던져 집어넣기 게임도 신명 나게 할 수 있었다. 저학년이 하는 청백 게임 중 어느 팀이 먼저 큰 공을 콩주머니로 맞혀서 터트리는지도 그날의 큰 관심사였다. 고학년 남자들만 하는 기마전도 더없이 멋졌다. 공부에서는 꼴찌 하는 애들도 그날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신나는 날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런 부푼 마음의 하이라이트는 점심시간이었다.
식구가 많은 집은 마치 온 가족 잔치하듯 돗자리를 펴고 음식을 차려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형제가 예닐곱씩 하던 때였으니까. 그 아이들이 큰 놈에서 작은놈까지 죄다 둘러앉고 거기다 어머니나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끼었다 하면 열 두엇 넘는 것은 기본이었다. 게다가 이모네 고모네 큰집 작은집 까지 섞이다 보면 그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때론 집성촌 한 마을이 죄다 일가친척이기도 했으니까.
'** 마을' 식으로 동네 전체가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함께 장만해서 모이는 경우도 있었다.
푸진 점심을 먹고 나면 대충 파장의 기색이 보였다. 부모님께 받은 특별 용돈도 이미 주위의 장사들에게 죄다 쓰고 난 후니까. 대부분이 점심 후 몇 개의 게임을 더 하고 청백 계주를 끝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가 2학년 아니면 3학년 때쯤의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동생은 아직 취학 전이었고 우리 집은 학교에서 한참이나 멀었다. 엄마가 학교에 복직을 하셔서 시외의 학교로 출근하시던 때였다. 아침에 내 도시락(당시에는 '벤또'라고 불렀다)은 할머니께서 나중에 따로 보내주실 거니 그냥 가라고 해서 홀가분하니 학교에 갔다. 워낙 학교에서 먼 동네라서인지 아님, 우리 집이 그 마을 토박이들과 섞이지 않아서였는지 나는 점심시간이 와도 혼자라서 낄 데가 없었다. 짝꿍이 점심때 저희 마을 차일 밑에 가서 같이 밥을 먹자고 했지만 싫었다.
드디어 점심시간. 우리 할아버지께서 자전거에 내 도시락을 싣고 와 놀이터 옆 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계셨다. 갓 지은 밥을 두툼한 천에 감싸서 시간 맞춰 오신 덕에 도시락은 따듯했다. 운동장 한쪽 조용한 곳에 자리하고 앉아 할아버지는 집에서 드셨다며 내게 어서 먹으라고 권하셨다. 그 도시락 안에는 아직도 따듯한 계란말이와 멸치조림 등이 들어 있었다. 아마 그 계란은 우리 집 닭장의 닭들이 어제 낳은 달걀일 것이다. 경우 바르고 솜씨 좋기로 소문난 할머니의 도시락은 정말 맛있었다.
하늘은 한없이 파랗고 바람은 좀 있었지만 햇살이 밝던 날, 근엄하셔서 조금은 어려운 할아버지 곁에서 먹던 그 도시락은 참 따듯했다. 운동장의 소란스러움과 주위를 휘돌던 먼지 속에서도 마치 내 공간은 완벽한 막으로 둘러싸인 듯 안온하고 포근했고 한갓졌다. 혼란하고 두서없는 중심부를 떠나 다른 세계인 듯, 행복함 감사함과 함께 나 홀로인 것 까지도 감미로웠다.
할아버지께서 내 학교에 오신 것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다 먹은 도시락을 챙겨서 나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신 할아버지. 그날 운동회가 파하고 흙강아지가 되어 할아버지 자전거 뒤꽁무니에 올라앉아 집에 갔다.
아마도 내가 살면서 느끼는 행복감의 빛깔이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화사하게 반짝이며 자지러지게 행복하고 뛸 듯이 기쁜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 잔잔한 듯, 따듯하면서도 충만한 느낌이랄까. 난 그런 느낌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그게 행복이란 느낌의 절대 평균치에서 어디쯤을 차지하는지 모르고 또 그런 게 있기나 한 건지도 모르지만. 운동회 때 할아버지께서 가져오신 도시락을 반갑게 먹던 그 어느 가을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