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엘리베이터에 A4 용지에 쓴 대자보(?)가 한 장 나붙었다. 우리 라인에 사는 우리 동 대표의 발제문이었다. 전체 동 대표 모임에서 아파트 위탁 관리 문제가 나왔는데 의결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입주민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고 오히려 큰 평수는 관리료가 인상되는 경우가 생긴다고 했다. 따져보면 위탁회사 배 불리는 일만 하는 이런 안건이 나온 배경에는 입주민 동 대표 중 하나가 그 회사와 관계된 사람이라는 이야기까지 씌어 있었다. 이런 일이 갑작스레 결정되었으니 입주민 여러분이 깊이 생각하시어 전체 찬반에 붙여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아래층 아주머니도 이 문제에 관심을 나타냈다. 내내 이 곳에 근무한 나이 든 경비원들을 내보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셨다. 나는 나중에 관리소장에게 따로 전화를 하거나 반대 의견 표시를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에 있던 약국 옆의 병원 경우, 처음에는 각 층마다 청소원 아주머니가 한 분씩 계셨다. 그러다가 얼마 후 용역 회사 관리로 넘어갔다고 했다. 병원 입장에서는 사람 관리하기가 편하다고 들었다. 청소하는 사람도 대부분이 새로 바뀌어서 뭐 그런가 보다 싶었다. 그들이 소속된 곳은 이제 병원이 아니라 용역 회사였다. 그러다 보니 병원 내에 무슨 행사가 있어도 그들은 겉돌고 소외되었다. 더 이상 병원 직원이 아니어서 그들을 해고시키거나 채용하는 것도 병원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 말로 하자면 비정규직이었을 것이다. 이와 꼭 같은 일이 지금 우리 아파트에서 벌어지려고 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 새로운 공고문이 나붙었다. 전에 나붙은 글은 문장도 그렇고, 글의 논리성보다는 이웃에 일러바치는 듯한 호소문이라면 이번의 것은 정제된 문장으로 직접 관리와 위탁 관리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논리적인 2장짜리 글이었다. "위탁관리의 경우 관리소장은 그대로지만 인건비 절감을 위해 경비원 수를 줄일 것이다. 위탁 관리의 경우 결국은 모든 것이 영리 중심이라 입주민의 안전이나 편의보다는 회사의 이익에 충실한 방향으로 갈 것이고 결국은 실제 관리비용의 절감도 별로 없으면서 실이 더 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글 쓴 사람은 밝히지 않았지만 돋보이는 글이었다.
바로 며칠 후 또 다른 글이 붙었다. 이번에는 아주 세련된 문장이었다. “촛불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듯이 입주민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 바로 주민 자치관리입니다.”라면서 서울의 몇몇 대형 아파트가 위탁관리를 했다가 문제점이 노출되었던 예를 들며 이런 경우에도 법적 책임에서 입주자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까지 지적했다. 그리고는 “자치 관리가 맘에 안 든다고 위탁한다는 것은 자식이 공부 못한다고 교육을 포기하는 부모와 다를 바 없습니다. 더 많은 입주민들의 애정과 관심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 “며 끝을 맺고 있었다.
며칠 후 새로운 공고가 게시되었다. 각 동마다 입주민들의 찬반 %가 표시되었고 과반이 훨씬 넘는 입주민들이 위탁 반대의사를 표시해서 위탁 건은 폐기되었고 종전대로 자치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우리 동의 반대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20년도 더 된 이 낡은 아파트를 나는 앞산이 있어서 좋아했는데 이제는 이런 이웃들이 있어서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이번 사건 덕분에 가끔씩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만 나누던 어르신들이 전직 공무원, 교수, 변호사였던 것도 알게 되었고(누구인지는 구분 못하지만) 음식물 쓰레기통 들고 오가며 인사 나누던 아주머니들이 나이 들고 오래된 경비원 아저씨들을 마음속으로 많이 챙기고 계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아파트의 길냥이들에게 먹이통을 두고 늘 먹이를 챙겼고 그 덕인지 이 녀석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났다. 이 녀석들이 추운 계절에는 햇볕에 따듯해진 차의 보닛 위에 나른하게 누워서는 비켜달라는 내 재촉에 귀찮다는 듯, 겁먹지 않고 거드름을 피우며 느릿느릿 비켜서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정 많은 이웃들의 성정을 믿어서일 거라는 생각도 새삼 드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이웃들 덕분에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은 앞으로도 계속 4대 보험이 들어가는 정규직인 분들이다. 아직 정정하고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데도 졸지에 나이 들었으니 그만두라는 뜻밖의 통고를 받지 않아도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