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퍼즐 - 『소년이 온다』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
너는 눈을 크게 떠본다. 좀 전에 가늘게 떴을 때보다 나무들의 윤곽이 흐릿해 보인다. 언젠가 안경을 맞춰야 하려나. 네모난 밤색 뿔테 안경을 쓴 작은형의 부루퉁한 얼굴이 떠올랐다가, 분수대 쪽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에 묻혀 희미해진다. 여름이면 콧잔등을 타고 자꾸 안경이 흘러내린다고, 겨울엔 실내에 들어갈 때마다 안경알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작은형이 그랬는데. 더이상 눈이 안 나빠져서 안경을 안 쓸 순 없을까.
─『소년이 온다』중
퍼즐을 맞춰 가다 보면 주변부 조각들을 모두 제자리에 끼워넣음으로 인해 언젠가 그것들과 얽혀 있었을 한 조각의 윤곽이 드러날 때가 있다. 우리는 주변 조각들에 출력된 무늬로부터 빈 자리에 무슨 조각이 와야 할지 짐작한다. 그제서야 이름 없는 퍼즐 조각은 자신이 돌아갈 자리를 얻는다.
'광주에는 오월에 제사 없는 집이 없다.' 작년 5월 17일자 경향신문 뉴스의 제목이다. 40년이 다 되도록 어떤 사람들은 해마다 죽음을 추모한다.
1980년 5월 광주에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폭력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대는 유령이 되어 시체탑 위를 떠돈다. 은숙은 출판 검열 때문에 경찰에게 뺨을 맞는다. 진수는 고문 후유증으로 자살한다. 선주는 20년이 지나도록 유치장에서의 성고문을 잊지 못한다. 동호의 어머니는 형사들의 책상을 밟고 올라가 전두환의 사진을 부순다. 이들은 모두 동호의 죽음을 공유하는 가족과 친지들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들은 거대하고 부당한 폭력의 기억을 떠안고 산다.
폭력은 휘발되지 않고 상처로 남는다. 상처는 격통이 지나가고 피가 멎은 후에도 딱지로 남고 흉터로 남는다. 원래 피부와 어울리지 못하는 반들반들한 새살은 계속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책갈피처럼 인간에게 과거의 어떤 시점을 영사한다.
소설은 그것을 들여다본다. 과거를 명명백백 밝히겠다며 파헤치기보다 정대, 은숙, 진수, 선주, 동호의 어머니에게 남은 상처들, 그들의 심신에 파인 손실들을 들여다 본다.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이 겪은 폭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통해 동호가 겪은 부당한 폭력을 증언한다. 살아남은 인물들이 상처를 통해 과거를 기억할 때 그들의 파인 자국들은 한 데 모여 누군가의 윤곽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 빈 자리로, 소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