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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Mar 01. 2019

허무개그와 니체와 『노인과 바다』

청새치, 그 이후


  '판타지개그.' 당신이 90년대생이라면, 어릴 때 플래시365나 주전자닷컴 등의 사이트에서 좀 놀아본 세대라면 익숙할 단어다. '허무개그', '썰렁개그'등의 이름을 달고 온라인 곳곳에 퍼져나가던 이 일련의 플래시 무비(movie)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가히 일종의 흐름이자 운동(movement)이었다. 어도비 플래시로 만든 허접한 애니메이션과 썰렁한 말장난 따위가 그 때는 어쩜 그렇게 웃겼는지.




썰렁개그가 나오면 춤을 춰요(BGM : 이박사 - '스페이스 판타지')



   물론 지금 보면 재미 없다. 피식 하고 바람빠지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왜일까. 옛날에 재밌던 개그들은 왜 지금 보면 재미가 없을까. 왜 웃찾사는 망하고 개그콘서트는 옛날만 못할까. 배꼽 잡고 웃던 유행어를 지금 들으면 얼굴이 화끈화끈해지는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이미 봤으니까.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말한다.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ärker(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개그도 똑같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개그는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한바탕 바닥을 구르며 웃어제낀 사람들 중, 배꼽이 빠져 출혈사하지 않은 사람들은 강해진다. 웃음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웃김의 총량이 늘어난다. 그래서 이미 본 개그는 재미가 없다. 강해졌으니까.






니들이 만새기 맛을 알아?


   『노인과 바다』를 근육이 울룩불룩한 마초 할아버지가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괴물 같은 거대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모험 소설인 줄 알았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웬걸, 노인은 담담하다. 선입견은 초짜 낚시꾼의 작살처럼 보기 좋게 빗나간다.


   노인은 좀 더 오랫동안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싶었지만 언제 또 고기가 날뛸지 모르기 때문에 몸을 일켜 발로 버티고는 해를 향해 손을 들어 보았다. 낚싯줄이 갑자기 풀려 나갈 때 껍질이 조금 벗겨졌을 뿐이었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손을 다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자, 그럼 저 다랑어 새끼를 먹어야겠군. 갈고리대로 끌어다가 여기서 편안하게 먹어야지." 손이 마르자 그가 말했다.
   노인은 무릎을 꿇고 갈고리대로 고물 쪽에서 다랑어를 찾아 사려 놓은 낚싯줄을 피해가며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줄을 다시 왼쪽 어깨에 고쳐 매고 왼쪽 팔과 손으로 버티면서 고리에서 다랑어를 빼낸 뒤 갈고리대를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노인은 아주 담담하다. 가져 온 식량이 떨어져 만새기와 다랑어 새끼를 잡아 먹으면서도 다음엔 소금과 라임을 챙겨 와야겠다며 혼잣말을 하고, 길길이 날뛰는 청새치를 '형제'라고 부르며 씁쓸한 농담을 던진다. 울거나 웃는 격앙된 감정은 그의 몫이 아니다. 노인의 몫은 오로지 낚시이고, 나머지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그놈들한테 내가 졌어. 마놀린. 놈들한테 내가 완전히 지고 만 거야." 노인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에요.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라고요."
   "그렇지. 정말 그래. 내가 진 건 그 뒤였어."



   그는 결국 청새치를 잡아 올린다. 노인은 작살로 고기의 숨통을 끊고 밧줄로 뱃전에 단단히 매단다. 족히 700kg는 될 법한 고기를 끌며 마을로 돌아가는 노인에게 찾아온 것은 상어 떼다. 청새치의 살점을 떼어 가는 상어 떼와 혈투를 벌이던 노인은 자신에게 승산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녹초가 되어 항구에 도착한다. 이젠 쓰레기가 되어버린 청새치 등뼈를 데리고.


   

인간은 패배할 수도 있고, 파멸할 수도 있다. 단지 강해질 뿐이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다"고 중얼거리던 노인은 마지막에 와서야 패배를 인정한다. 그는 졌다. 피땀 흘려 잡아 올린 청새치는 앙상한 뼈만 남았고, 그의 칼은 부러졌으며, 배도 망가졌다. 그러나 노인은 파멸하지 않았다.


   노인은 청새치를 잡아내겠다는 목적을 이룬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해피엔딩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노인은 또 배를 탈 것이며, 우리는 또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그것을 반복한다. 그렇기에, 패배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끝이 아니다.  그것은 패배했을지언정 파멸하진 않았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우리를 파멸시키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인간은 패배할 수도 있고, 파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해질 수 있다. 다음, 그리고 다다음, 죽는 날까지 이어질 앞으로의 항해에서 노인은 얼마나 더 강해질까. 어쩌면 그는 상어 따위야 일소에 부쳐 버릴지도 모르겠다. 마치, '판타지개그'를 보는 지금의 우리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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