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흰 이유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 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흰』 본문 中 ‘눈보라’
한강이 2014년 쓴 흰은 에세이와 소설과 시의 경계 어딘가에 서있는 실험적인 책이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만든 흰 것의 목록에 하나하나 짤막한 이야기를 덧붙여 썼다. 이 책은 ‘사라질-사라지고 있는-아름다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작가 본인이 밝히고 있다. 짧은 이야기들을 모두 엮어보면 한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얼굴도 모를 자신의 형제에 대한 기억과 슬픔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라 말할 수 있다. 이 서사는 짧은 이야기 속에 잘 숨겨져 있어 찾았을 때의 재미와 충격이 있다. 여러분이 흰을 아직 읽기 전이라면 내가 이 즐거움을 뺏은 것이 되겠다. 유감을 표한다.
한강이 말하는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은 명확히 보인다. 생명이다. 한강의 생명에 대한 사랑은 이전의 책들인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한강은 스스로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삶을 껴안는 것은 숙제 같은 일’이라고 삶을 껴안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책에서 말한다. 한강에게 삶이란 그늘이 있는 것. 그늘에서 밝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흰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말하는 것인지, 그저 북유럽에 가까운 폴란드에서 써서 그런 건지, 그냥 이 이야기를 쓸 때 겨울이었던 건지, 얼굴모를 아기가 겨울에 태어나 죽어서 그런건지, 한강이 작성한 흰 것의 목록은 겨울의 이미지에 가깝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인용하였던 소제목 ‘눈보라’만 보아도 그렇다.
폭염경보와 폭염주의보가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는 요즘에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여름도 흰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 뜨거운 볕이 참 희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폭염도 재난이라고 정식으로 규정한 기간이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이 재난 속에서 희게 빛나는 것은 아스팔트다. 달궈진 아스팔트에 서면 뜨끈한 기운이 신발 밑창을 뚫고 올라온다.
더위를 피해 떠나는 활주로에는 그늘이 없다. 그늘 없이 흰 곳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하는 이들은 까맣게 타기만 한다. 더 이상 까맣게 태울 살갗이 없을 때 얼굴이 하얗게 되어 쓰러져 흰 바닥의 일부가 된다. 활주로 노동자에게 여름은 잔인하게 흰 계절이다. 쉼터가 없어 차량 아래로, 비행기 날개 아래로 기어들어 몸을 뉘여야만 하는 계절.
삶을 끌어안으려 한다면 한 여름 햇볕아래 아스팔트를 잘 바라보자. 혼이 아스팔트 위를 떠도는 모습을. 혼이 흰 계란처럼 잘 삶아지고 있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