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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Nov 22. 2019

모래에 파묻힌 시지프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L´Absurde


상상해 보자. 여느 때와 똑같은 저녁, 당신은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기분은 아주 좋다. 당신이 오랜 시간 공들여 온 프로젝트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칭찬에 인색하던 상사도 이번만큼은 당신의 성공을 크게 축하했다. 제멋대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의식하며, 당신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냉장고에 차게 식혀 둔 맥주와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를 상상하면서. 그러나 당신이 마주한 것은, 당신의 보금자리가 활활 불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때 당신은 뭐라고 말할 것인가. 어쩌면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말도 안 돼!"라며 소리치지 않을까.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 우리의 계획과 이해로는 따라갈 수 없는 일. 오히려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득히 초월해버리는 것. 그러나 오히려 그 무엇보다도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 것. 우리는 그것을 '부조리(L´Absurde)'라 부른다.'


Albert Camus, 1913~1960


알베르 카뮈는 그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그리스 신화를 인용하며 부조리에 대해 논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기발한 잔꾀로 올림포스의 신들을 기만한 '시지프(Sisyphus)'는 집채만 한 바위를 높은 산의 정상까지 밀어 올리라는 형벌을 받게 된다.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이 형벌의 진가는 따로 있다. 시지프가 정상에 도착하면,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러면 시지프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시지프에게 내려진 진짜 벌은, 육체적 괴로움이 아닌 무의미의 반복이라는 부조리다.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가 1962년 발표한 소설 『모래의 여자』에는 이와 같은 부조리한 삶의 면면이 깊게 녹아들어 있다. 주인공 '니키 준페이'는 여름휴가를 맞아 취미인 곤충 채집을 위해 한적한 바닷가로 향한다. 저녁이 되자 그는 하룻밤 묵을 요량으로 근처 부락을 찾는다. 그곳은 거대한 사구 기슭에 반쯤 묻힌 채, 집집마다 깊은 모래 구덩이 속에서 살아가는 조금 기묘한 부락이었다. 그는 그중 사구와 가장 가까운 한 민가에서 저녁식사와 잠자리를 대접받는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새로운 세상과 마주한다. 그를 모래 구덩이 아래로 내려보내 주었던 새끼줄 사다리를 부락 사람들이 치워버린 것이다. 흘러내리는 모래 때문에 경사면을 타고 나갈 수도 없다. 그는 완전히 갇혀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친절했던 주민들도 하루아침에 변했다. 그는 구덩이에 갇힌 채, 거대한 사구로부터 마을을 향해 흘러내리는 모래를 퍼낼 것을 강요당한다. 탈출과 자유를 향해 얽힌 '준페이'와 마을 주민들의 서스펜스는 독자를 날 선 긴장감과 부조리의 세계로 몰고 간다.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는 그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내내 매달려 있기만을 강요하는 현실의 답답함에 비하면 이 얼마나 신선한가.
   물론 모래는 생존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정착은 과연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인가. 정착을 부득불 고집하기 때문에 저 끔찍스런 경쟁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정착을 포기하고 모래의 유동에 몸을 맡긴다면 경쟁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사막에도 꽃은 피고 벌레와 짐승도 산다. 강한 적응력을 이용하여 경쟁권 밖으로 벗어난 생물들이다. 예컨대 그의 길앞잡이속처럼…….


Abe Kobo(安部公房), 1924-1993


소설에서 세계는 두 가지로 나뉜다. 모래 구덩이 바깥의 세계와 모래 구덩이 안의 세계가 그것이다. 모래 구덩이 바깥의 세계는 그가 원래 누려오던 삶의 세계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 아내와의 권태롭고도 정다운 생활, 이에 포인트를 주듯 새로운 곤충종을 발견하겠다는 특이한 취미까지……. 그는 깔끔하게 정돈된 '정착'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모래 구덩이 안의 세계는 이와 정반대다. 하루하루 사구로부터 모래가 흘러내려오는 통에, 삽질을 하지 않으면 집이 모래에 깔려 죽게 된다. 입자도 고운 모래 알갱이들이 집의 판자 틈새를 뚫고 들어와 식사와 잠자리 위에까지 침투한다. 마을 주민들은 물과 생필품을 인질로 삼고 그와 기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이곳은 멈추면 죽는 곳이다. 유동하고 무너지는 '혼돈'의 구역이다.


이 중 자유로운 곳은 어디일까. 당연히 바깥이다(나는 '혼돈이 곧 자유'라는 유치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반면 안은 그렇지 않다. '준페이'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부락 주민들의 계략에 빠져 강제로 노역하는 사람이 아닌가. 다만 그는 탈출을 위해 분투한다. 맨몸으로 모래벽을 향해 돌진하는 건 물론이요, 함께 살게 된 여자 주민을 인질로 잡고 농성하거나 옷과 천을 이어 만든 로프를 타고 오르기까지 온갖 시도를 감행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삶을 향한 '준페이'의 의지와 작가의 독특한 자유관(觀)이다. 로프를 타고 구덩이를 벗어난 '준페이'는 부락 바깥을 향해 도망치던 중 모래늪에 빠져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두 개다. 이대로 모래늪에 빠져 죽거나, 아니면 그를 뒤따라 온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오는 것. 물론 후자를 선택하면 다시 부락으로 돌아가 노역에 시달려야 한다. 결국 '준페이'는 살려달라고 외친다. 그는 죽음으로 도피하는 대신, 혼돈과 무의미와 부조리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선택한다. 


Film 〈The Woman in the Dunes〉(1964)


소설의 결말은 이렇다. 반년간 체념한 듯 노역하던 '준페이'는 우연히 모래가 물을 뽑아 올리는 모관 현상을 목격한다. 그는 이를 이용해 물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저수 장치 개발에 착수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평소 칼같이 거둬지던 사다리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저수 장치 완성과 사다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준페이'는, 결국 사다리를 타고 탈출하는 대신 구덩이 안에 남기로 한다.


'준페이'는 탈출을 포기한 것일까. 하지만 나는 '준페이'의 선택을 '포기' 혹은 '굴복'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이 선택에 감탄한다. 그 이유는 '준페이'가 모래 구덩이를 벗어나더라도 혼돈과 무의미라는 삶의 부조리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에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저수 장치 개발에 이르러, 그의 일과는 수동적인 노역이 아니라 능동적인 투쟁이 되었다.


이제 아베 코보의 자유론은 이렇게 읽힌다. 자유는 어딘가 먼 곳에 있는, 그것을 쟁취하거나 그에 도달할 수 있는 것 따위가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부조리와 부자유의 한가운데에서 이를 직시하고 맞서는 것. 그 모순적인 몸짓 하나하나가 낳는 순간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 부를 만하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준페이'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다고.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The struggle itself toward the heights is enough to fill a man’s heart.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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