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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Jan 29. 2018

<용순>

"열여덟 용순은 육상부 담당 체육 선생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체육에게 왠지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다.  


엄마 같은 친구 문희와 원수 같은 친구 빡큐가 합심해서 뒤를 캐어보지만, 도통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아빠라는 사람은 엄마 없는 딸을 위한답시고 몽골에서 새엄마를 데리고 왔다.   


유난히 뜨거웠고 무던히도 달렸던 그 여름,


사랑과 처음 만난 소녀, 용순."


<용순>이 매력적인 건 캐릭터의 희소성 덕분이다.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내꺼'를 갖기 위해 아득바득 분투하는 이야기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다들 아시죠? 그러니 이 영화의 가치(혹은 성과)는 영화의 완성도보다 영화 외적인 환경에 기댄다. 극심한 가뭄에도 콩을 심어 수확한 것, 그것만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 장마가 지면 너도나도 콩 농사에 나설 것이다. <용순>은 용기 있게 개척자로 나섰다. 물론 사심이 섞인 얘기다. '아저씨' '욕망' '질주' 영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달리 말해보자. 우주 상에 존재하는 영화가 <용순> 한 편뿐이라면 매우 아쉬울 거다.  왜냐면 영화 자체만 두고 보면 그리 재밌지가 않기 때문이다. 황금 같은 여름 휴가 때 속초에서 먹는 맛없는 물회 같다. 맛있게 먹고 싶은데 정신 승리가 잘 안 된다. 주인공 열여덟 소녀 용순은 분명 자기만의 욕망에 솔직하고 그걸 주장할 줄 아는 캐릭터인데, 별로 정이 안 간다. 영화에는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거사―시한부 선고를 받고 첫사랑에게 돌아가 죽음을 맞이한 엄마와 그에 무관심하고 국제결혼에 열을 올리는 아빠―가 플래시백으로 나오지만 부족하거나 어긋난다.  


며칠 전 프랑스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 <로우>를 추천하는 리뷰를 썼다. 비교가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저스틴은 치미는 식인 욕구를 주체하지 못한다. 누구라도 역겨워할 비윤리, 반윤리다. 근데 이쪽이 더 납득이 간다. 저스틴을 보고 있으면 안쓰럽다. 어떻게든 인간 살을 안 먹으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자꾸만 군침이 도는 걸 어쩌지 못해 괴로워한다. '만약 쟤가 나라면'이라는 끔찍한 가정을 자꾸만 하게 된다. 반면 용순의 선생님을 향한 당돌한 구애는 치기 어린, 뭣 모를 때의 방황처럼 그려진다. 그걸 의도한 건 아닐진대 말이다. 결국 사회의 룰을 어기는 행동이 얼마나 부조리한지가 아니라 대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아야 좋은 영화가 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금 곱씹게 한다.     


다만 <아가씨>나 <악녀>와 비교했을 때, 같은 남자 감독의 작품임에도 <용순>은 비교적 여성성―이런 말을 남자인 내가 하는 게 설득력이 있을랑가 모르겠지만―을 살린 영화고, 그걸 동력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편을 들고 싶다. 이 영화를 만든 신준 감독은 2014년에 <용순, 열 여덟 번째 여름>이라는 단편영화를 찍었다. 아직 못 봤는데 찾아서 보려 한다. 이 영화가 장편보다 짜임새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랬듯, 세상에 내던져져 상처 입었음에도 말할 수 없어 이해 받지 못할 행동을 반복하며 수렁에 빠지는 용순을 더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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