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고 싶은 사람에게 구애를 하는 순간에는 오로지 그 사람에게만 집중한다.
연애하고 싶은 상대의 태도와 표정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연인이 되면 누가 먼저 좋아했던 누가 먼저 구애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전과는 또 다른 국면이 된 것이다.
연애하고 싶었던 상대와 깊은 관계가 될수록, 그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질문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순간에도 사랑받는 걸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확인받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일수록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만다.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까지도...
8년 넘게 솔로였던 그는 테니스 모임에 가입해서 그녀를 만났다.
몇 번의 거절에도 그는 끊임없이 구애했고, 결국 그녀도 그의 마음을 받아줬다.
그렇게 연인이 된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날 찾아왔다.
"여자 친구랑은 잘 지내?"
"여자 친구가 사무실로 홍삼이랑 마카 그리고 아로니아를 보냈어요."
"무슨 기념일?"
"아니요. 요즘 제가 기운이 없다고 하니까. 건강 챙기라고 하면서 온갖 건강식품을 보낸 거예요."
"좋겠다. 그렇게 몸 챙겨 주는 사람도 있고."
"글쎄요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안 좋으면 대체 어떻게 해야 좋아지니?"
"다른 사람들도 받았을 거 아니에요."
"여자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도 다 준 걸 너에게도 보낸 거야?"
"전에 그랬거든요. 자긴 사귀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최선을 다 한다고."
"그건 훌륭한 거잖아."
"그런데 그게 문제기도 해요."
"무슨 문제?"
"그전에 만나던 사람에게도 똑같이 했을 거 아니에요. 어쩌면 저보다 더 좋은 걸 선물했을 수도 있고요."
"사랑을 하면 유치해진다는 말 딱 너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아니요. 전 심각해요. 실은 그것 때문에 상담하러 온 거예요."
"너 그 여자 친구하고 사귀기 전에 엄청 노력했었잖아?"
"노력했죠. 알다시피 제가 여자 경험도 없고... 지금 여자 친구가 거의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그랬구나. 난 네가 그전에 몇 명 있다고 말해서 처음은 아닌 줄 알았어. 솔로 생활을 오래한 줄 만 알았지."
"몇 명 있었다는 건... 오래전에 좋아했던 사람들이에요. 오래 사귀지도 않았고 깊은 관계도 아니었어요."
"아무튼 지금 여자 친구가 거의 처음 사귀는 사람이라는 거지?"
"맞아요. 거의 처음이에요."
"그런데 그게 뭐 잘못됐니? 너희 커플은 사귄 지도 벌써 1년도 넘었고, 회사에 건강식품까지 보내고 잘 지내잖아. 뭐가 문제야?"
"며칠 전에 여행을 갔어요. 1주년 기념 제주도 여행이었고요."
"좋았겠네. 제주도."
"내가 몇 번째 남자냐고, 여자 친구에게 물어봤어요. 처음으로요."
"정말 쓸데없는 질문을 했구나. 그래서 여자 친구는 뭐래?"
"그게 그렇게 알고 싶냐고 되묻더라고요. 그래서 전 정말 궁금하다고 했죠."
"1주년 기념 여행에서 물을 만큼 그게 그렇게 궁금했니?"
"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궁금했어요. 사귀기 전에도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있었으니까요."
"여자 친구가 말했니? 네가 몇 번째 남자라고."
"솔직하게 말하길 원하냐고 물었어요. 당연히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말했죠. 거짓으로 혼란스러운 건 싫으니까요. 전 여자 친구의 열아홉 번째 남자래요."
"그래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속이 시원해지던?"
"아니요. 솔직히 그 뒤로 화병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안 좋아요."
"열아홉 번째라는 말을 들은 뒤로 그렇다고."
"맞아요."
"열아홉 번째여서 억울했구나?"
"모르겠어요."
"그럼 안 억울해?"
"아니요. 솔직히 좀 짜증 나요. 억울하기도 하고요. 전 여자 친구가 거의 처음인데!"
"여자 친구에게 네 이야기도 했어? 거의 처음이라고. 처음도 아니고, 거의 처음이었다고."
"제 이야기는 당연히 했죠. 그런데 여자 친구의 전 남자들을 용서할 수 없어요."
"왜 그 사람들이 여자 친구에게 나쁜 짓이라도 했니?"
"아니요. 그냥 너무 억울해서요. 전 여자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었는데... 여자 친구는 그동안 다른 남자들을 만났을 거를 생각하니까 미칠 것 같아요."
"네가 억울해하니까. 여자 친구 반응은 어땠어?"
"여자 친구 앞에서는 참느냐고 혼났죠. 대범한 척하느라고 그런 건지 요즘 몸이 안 좋고 소화도 안 되고 계속 나빠지고 있어요. 그래서 찾아온 거예요. 말이라도 시원하게 하려고요."
"넌 지금 그 친구와 잘 지내고 싶니?"
"결혼까지 생각했어요."
"생각만 했구나. 열아홉 번째라서."
"아니에요. 놀리지 마세요."
"그럼 당장 잊어버려."
"맞아요. 저도 알아요. 잊어버려야 하는 거. 그런데 바보처럼 계속 생각이 나요. 그게 견디기 힘들어요."
"그럼 방법이 하나 있어."
"뭔데요?"
"당장 여자 친구가 만난 남자들 숫자만큼 너도 다른 여자를 만나면 돼. 그럼 억울하지 않을 거잖아."
"그건 말도 안 되죠."
"말이 안 되는 건 바로 너야. 과거에 남자 친구를 질투하는 너를 여자 친구가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죠. 저도 알아요. 그냥 그게 힘들어요."
"알았어. 네 마음 알겠어. 그럼 이렇게 생각해봐. 그 순서의 첫 번째가 되었다면, 아님 두 번째, 세 번째... 열여덟 번째였다면. 네가 만약 열아홉 번째가 아니었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잖아. 그냥 몇 번째 남자이겠지. 그런데 그 사람과 정말 오랫동안 함께할 마음이 있다면 몇 번째는 중요하지 않게 될 거야. 평생의 단 한 사람이 될 거니까."
"저도 그녀에게 평생의 한 남자이길 바라죠."
"나도 네가 더 이상 열아홉 번째 남자라고 칭얼대지 않기를 바란다."
석 달 뒤에 그에게 청첩장이 날아왔다.
우리는 평생 몇 명의 사람을 만나 몇 번의 사랑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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