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내전 종결보고서

[2화] 처방된 평화

by 도요

백발이 성성한 의사는 내게 우울증이라 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이란 설명을 덧붙이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나는 문제가 곧 해결되리라는 순진한 기대 속에, 터질 듯 빵빵한 약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교전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약을 잔뜩 먹어도 가슴에 쇳덩이가 올라앉은 듯 숨이 무거웠다.

며칠에 한 번, 병원 문지방이 닳도록 정신과에 드나들며 약을 조정한 후에야 비로소 숨을 조금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삶의 통제권을 쥐고 있지 않았다. 사람이 가득한 백화점 지하에서 갑자기 주저앉았고, 면접에 들어가면 호흡이 가빠져, 할 말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공황 증세를 가라앉히는 '필요시 약'은 내 가방 안 필수품이 되었다.


당시 내 주변에 정신과에서 약을 타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아무도 공공연히 정신과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때였다. 정신과 약은 의존성이 강해서 쉽게 중독된다고 믿던 시대였다.

그런 약에 손을 대 버렸으니 앞으로 평생 약의 노예로 살게 되는 건 아닐까, 나도 내심 두려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증상을 제어할 수 있게 되자, 나는 교전 중이라는 사실을 곧잘 잊었다. 취업도 했다. 겉으로는 일상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그건 약물에 기댄 불안정한 평화임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정신과 질환을 치료하는 데 있어 약물은 필수불가결한 도구다. 당뇨 환자가 인슐린을 처방받는 것과 같고, 환자가 '무엇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고 실천해야 하는 점도 동일하다.

당뇨 환자가 식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듯, 운동선수가 수술 후 재활을 하듯, 정신 질환 역시 본질적 치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신과 질환은 같은 진단명 아래에서도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공복혈당이나 콜레스테롤처럼, 딱 떨어지는 수치를 얻을 수 없다. 몸과 정신에 나타나는 증상도, 그에 따른 치료방법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치료가 효과적인지, 혹은 증상이 나빠졌는지를 인지하기도 어렵다.


체질에 맞는 약의 종류, 조합, 복용량을 찾는 것 또한 인내가 필요한 장기전이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덤볐다.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선비가 봇짐에 짚신을 바리바리 싸듯,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비했어야 한다.


나는 오래도록 짚신 한 쌍만 꼭 쥐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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