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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18. 2023

선생님, 저는 당신을 믿지 못합니다

색안경 쓴 쌤님이니까

   전부 대본 아니야? 한때 방송에 발 담갔던 사람으로서 고백해 보자면 대본이 있대도 보통은 흐름 정도만 있었달까. 차라리 대본이었으면 좋겠다. 최근 한 상담 프로그램을 보면서 눈과 귀를 의심하였다. 내담자는 빈말을 선호하지 않고, 매사 진심인 사람이라 말뿐인 인사치레는 지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민을 듣던 상담자는 한숨을 내쉬며 사는 게 힘들겠다는 언행을 뱉었고, 주변 시선과 자막은 내담자를 별다르게 바라봤다. 그 공간에서 내담자는 이상하다는 걸 증명받아 성공적으로 혼자가 되었다. 지나치게 정직하다는 건 뭘까. 상담자는 ‘사회적 통용어’라는 요상한 단어를 꺼내며 “밥 먹자.” 정도의 말은 인사치레로 받아들여야 하고,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혼자 힘들어지는 길이라고 공공연하게 판단하였다.

   대외적인 상담을 목적으로 앉아있는 전문가가 그런 격앙되고 주관적인 어휘를 택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의도였는지는 추측되었다. 결국 상처받는 건 기대하는, 즉 중요도가 높은 사람이니까, 통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맞추자는 거겠지. 그게 내담자가 덜 상처받는 방법일지도 모르니까. 그래. 상담자는 모르니까. 과연 내담자가 느끼는 감정 자체를 억압하도록, 자기 의심에 확신이 서도록. 고민의 모양 그대로를 부정하는 게 옳은 걸까? 그게 상담자를 믿고서 속마음을 꺼내준 내담자의 묻어남인데.   

  

   우리는 자신보다 아는 게 많다고 여겨지는 존재의 언어를 정답이라고 단정한다. 반박이라도 하면 그 전문가보다 잘 아냐면서 반문한다. 해석은 보는 면에 따라 달라지며, 그들도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주관적인 의미를 지닌 한 사람일 뿐인데 말이다. 예상대로 영상 댓글은 상담자의 솔루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옛날의 나라면 똑같았을지도 모른다. 사실을 떠나 믿음에 반발한다는 이유로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이처럼 스스로 믿지 못할 때 의심에 확신을 준 것도 다름 아닌 학교 선생님이었다.

   “또 너니? 당장 반으로 따라와!”

   “잘 봐. 너희 중에 이수민이랑 진짜 친구인 사람? 눈 감고 손들어봐. 비밀로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손들어.”

   중학교 때였다. 그 당시 나와 다른 반이었던 한 친구와 다투고 있었던 일이다. 그날 나에게는 선택권 따위 없었고, 모든 상황을 선생님 옆에서 지켜봤다. 내 눈은 뜨고 있는데, 손드는 애들끼리 비밀인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만 이번 사건은 내 잘못이었다.    

 

   점심 급식을 먹고 물을 마시던 중 식탁 네 칸 정도가 떨어진 위치에서 식사 중인 규한이 눈에 띄었다. 반가움에 나는 규한을 소리 질러 불렀고, 뜬금없이 반 토막 낸 고추를 던지고 도망갔다. 음식물을 남기는 게 아까웠다면, 변명이 안 되겠지? 또라이네.

   급식소를 나와서 친구들과 컴퓨터실 옆 바닥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몇 분 뒤 규한이 찾아와 계단 쪽으로 시선이 향한 나를 다짜고짜 이불 빨래하듯 밟았다. 평소였다면 일단 날쌔게 도망가면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을 텐데. 하필 복도 쪽에서 나타났던 터라 뒤통수에는 눈이 없다는 방심에 참교육을 불렀다. 흰색 교복은 순식간에 검정 그러데이션으로 탈바꿈했고, 바깥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컴퓨터실에 계시던 정보 선생님께서 나와 우리를 벌세우셨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식사를 마친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앞을 지나가셨다. 보자마자 나를 한심하게 내려다보시면서 규한에게만 말을 거셨다.

   “너는 몇 반이니? 원래 저런 애니까 네가 참아주렴.”

   누가 봐도 옷은 내가 더러웠는데, 선생님께서는 무작정 규한만 달래서 돌려보내셨다. 아니 물론 내 잘못이기는 한데,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선생님은 왜 원래라는 단어로 묻지도 않고 결론을 내리신 걸까? 다음 장면이 교실이었다. 마침 다음 수업이 담임선생님이셨고, 반에 가자마자 느닷없는 손 들기 게임은 시작됐다. 당황한 40명가량의 친구는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도 아무도 들지 않았다.

   ‘아, 나는 친구가 없구나.’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이 나가신 후에야 애들이 다가오더니 미안을 읊조렸다. 하지만 어렸던 만큼 공개 처형당한 나에게 뒤늦은 사과는 와닿지 않았고, 당일 수업과 청소 시간이 끝날 때까지 머릿속은 스스로와 친구들에 대한 의심으로 철렁거렸다. 도대체 무슨 의도셨던 걸까. 어떻게든 애를 기죽이려고? 아니면 왕따라도 만들고 싶으셨던 걸까?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딱 한 마디만 남기셨다.

   “너는 여기 무리도 아니고, 저기 무리도 아니면서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니?”

   꽤 참신한 발언이었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시는지. 이후에도 같은 말은 반복되었다. 이때는 내가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무리, 무리, 정말 무리수다. 선생님은 자기 반 학생이 여러 친구와 골고루 지내는 게 아니꼬운 문제인가 보다. 아무리 의도를 찾으려고 해도 중학생 아이에게 쪽 주기 위한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된 건 딱 하나. 그때 던진 고추가 콩나물국에 빠져 국물이 튀었다는 것. 최근까지도 규한은 고추에 정성스럽게 물을 담아 던진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화났다고… 나는 정수기 앞에 서 있었을 뿐인데 아직도 믿지를 않는다. 역시 꺼내지 않은 마음과 판단에는 오해가 따라오나 보다.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가진 장난기 많은 이미지와 그들의 고정관념은 상황 설명 따위 없이 선제적으로 답을 내렸다. 한 번은 학폭위(학교폭력 심의 위원회) 직전 면담에 불려 간 적도 있었다. 진실이 쉽게 왜곡되는 세상이라 오해 방지를 위해 결론부터 끄적이자면 ‘나는 가해자가 아니다.’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앞서 규한에게 두들겨 맞는 가련한 모습만 봐도 가해자일 수가 없다. 사건은 한 친구를 몇몇 애들이 수시로 괴롭혔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께서 애들 사이 지목되는 인원을 한 명씩 불러와 면담을 진행하셨다고 한다. 와중에 누가 내 이름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번에도 나는 장난조차 친 적이 없었지만 스스로 의심하였다. 어떤 친구 말로는 내가 남들보다 튀는 아이라서 당연히 사건에 연루됐을 것으로 추측했다고 한다. 뭔 씻나락 까먹는 소리지. 주변에서나 까불지 딱히 튀는 애도 아니었는데.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는 늦잠 자느라 다 끝나고 도착했는데, 아무도 몰랐다니까! 그리고 나는 면담 날 장염으로 조퇴했다. 다음날 누군가는 어제 핑계를 대고 도망간 게 아니냐고 트집 잡았지만, 이후에도 선생님께서는 나를 부르지 않으셨고, 알고 보니 피해자 친구가 직접 선생님께 찾아가 수민은 아니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래? 아니면 말고.’

   돌아보면 고정관념으로 인해 남겨진 억울함에는 작은 관심도 없었다. 언제는 여자애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든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랑 갈등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내 잘못이었고, 앞니 사건처럼 얌전한 애랑 무슨 일이 생기면 얌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 잘못이었다. 혹여 피해를 주장하면 그건 유별난 거다. 그들은 주관적 시선으로 프레이밍 하면서도 절대 그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들 궁금증을 해소해 줄 가십거리 정도의 앎이면 충분하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다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면 발끈. 그 분노는 누구 결핍일까. 반대로 참아서 얻는 건 만만한 호구 이미지였다. 실제 사건이 가진 모습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완벽히 설명된 상태에서도 결과는 쉽게 바뀌지 않았으니까.

   언제부턴가 나의 의심도 거뭇한 확신으로 탈바꿈했다. 정말 내 잘못인가? 아니면 나라서 잘못인 건가? 그래. 역시 내가 틀린 게 맞겠지. 미안. 다 내 잘못이야. 그들의 목소리는 어느새 무의식에 자리했고, 의식까지 뒤덮었다. 대부분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자신을 지킬만한 힘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내면의 혼란을 부풀릴 뿐이었다. 사람은 인정을 통해 확인받아 안정을 느끼고, 지지받으며 내디딜 힘을 얻는다.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준다는 생각만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어릴 적 나는 지지는 충만했지만, 대부분 환경에서 인정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게 내가 가진 제일 큰 결핍. 지금의 나를 만든 결정적인 요소였다. 이미 약해진 말에 힘을 기르는 방법은 증명뿐이었고, 그런데도 미움받을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람은 위협받는 상황에 방어기제로써 탓할 대상을 찾는데, 스스로 틀렸다는 확신을 가진 상태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그 대상이었다. 그렇게 사과와 눈치는 습관이 되었고, 사회에 맞춰 조금씩 얌전해졌다. 그 행동이 온전한 나를 잃어가는 억압일 거라고는 가늠조차 못했다.     


   ‘사회적 통용어’는 없다. 그런 건 누가 정하며, 그것 또한 하나의 주관일뿐이다. 혹시 투사를 정당화하려 만든 가짜 다수는 아닌지. 말에 타인의 힘을 더하기 위한 범위 넓히기는 아닌지. 오히려 범주화하고 프레이밍 된 상황을 현실화시키는 건 자기 말에 힘이 없다고 인정하는 꼴이다. 의미화된 이론 또한 자기 방어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약속되지 않은 의미에 다수와 소수는 중요하지 않으며, 주관을 통용어로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건 그저 이기심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비교적 현상에 가깝달까. 이미 우리말로 정해놓은 통용어니까. 도리 없는 행동에 유도리를 논한다. 약속된 통용어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한 건 분명코 그들이었는데. 왜 코리안 타임을 적용하지 않은 내 문제인 건지. 말과 행동의 일치가 뭐가 어려운 건지. 의미에 의미를 덧대느라 사는 게 힘들겠다. 다수가 줄임말을 쓴다고, 꼭 줄임말을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이해로 가기 위한 관심뿐, 독심술은 없다.

   또한, 그 껍데기가 언젠가는 진심이었을 때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기대한다면 우악한 모순일 거다. 그건 진심인 사람들에게 양아치… 아니 양치기 소년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도대체 위선은 어떤 자격을 가졌길래 융통성이라는 탈을 쓰고서 진심에게 지나치다는 별명을 붙일까. 혹시 작명 자격증인가. 관찰자로서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라면 사소한 말에도 책임이 따른다. 감정을 숨기고 참는 게 미덕이 되고, 진솔함이 악이자 바보가 되는 세상이 서럽다. 그 고삐가 풀리면 어떤 세상이 찾아올지는 상상하기도 무서울 정도다.


   나였다면 이 말을 전하고 내담자를 위한 선택을 제안했을 거다. 서로 가진 의미가 다르니 결국에는 자주 사용하는 의미를 인지하고, 각자의 의도를 헤아리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위 상담자도 같은 말을 했지만, 방송상 편집된 거라고 굳게 믿는다. 적어도 상담자라면 이해와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담자가 의심을 내려두고 편히 감정을 드러내도록. 세상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그게 상담자가 존재하는 이유고, 전문가의 역할은 정답 제시가 아닌 여유를 가진 한 사람이 나누어 주는 인정과 지지의 선순환이다. 그들의 말은 결코 법이 될 수 없으며, 책을 읽는 순간에도 한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듯 그만의 언어를 파헤친다. 서로 투사한 결핍이 점점 뻗어 나아가듯 진심에도 전염성 있다는 말을 믿는다. 결핍과 진심,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나누었을까? 언젠가는 진심의 무게만큼 존중이 오가는 세상이 오기를.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감정과 언어의 힘을 당연시하게 믿기를. 세상이 어떤 의미를 내세우든 받을 영향을 자유로이 선택하면서, 서로의 다름과 다채로움을 존중하면서 말이다. 자신에게 확신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안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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