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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18. 2023

저… 오줌이 안나오는데요…

화장실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장난인데 뭐 그렇게 예민하냐?”

   가벼운 장난이 있다. 물론 그 가벼움은 장난치는 사람 기준이다. 중학생 때부터 십 년이 넘도록 나는 친구들과 화장실 가는 게 불편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말하고 가거나, 몰래 가거나, 가는 척만 하고 사람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괜한 눈치에 화장실 문을 잠가야만 마음이 편하다. 그날 이후 따돌림당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따돌림의 범주에 들지 않아도 트라우마는 충분히 안겨 줄 수 있었다.      


   남자 화장실에는 일렬로 소변기가 나열되어 있다. 문만 하나 통과하면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만 허용된 장소인 만큼 다양한 장난이 발생하기 참 좋은 환경이다. 이런 장난은 왜 할까. 누군가 볼일을 보면 슬금슬금 뒤로 다가와서 엉덩이에 니킥! 그럼 당연히 멈추지, 나오겠냐? 뭐가 재밌는 건지 모르겠다. 그 행위가 웃긴 건지, 당하는 친구 반응이 웃긴 건지. 짜증 났고, 불안했고, 싫었다. 그래서 하지 말라면 무안한 웃음을 짓고서 안 하겠다며 인상을 구긴다.

   “아- 미안- 알겠어 알겠어- 진짜 안 할게!”

   문득 삼촌들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어른이나 애나 어찌 이리 똑같은지. 이미 신뢰를 잃은 그들의 말은 어차피 믿어지지도 않았고, 예상대로 같은 짓은 반복됐다. 감이라는 건 단순 추측이 아닌 인생의 데이터니까. 그들에게는 이미 습관이었고, 재미였고, 싫어하는 걸 알아서 언제 또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인지하였다. 그때 연속된 불안에 뻔한 결말이 그려지면서 무뎌짐이라는 안정을 택한다. 솔직함에 별난 애가 됐던 것처럼, 또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건 아닌가. 분노 대신 억압이라는 생존법을 터득하는 거다.

   흔히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공격이라 착각하고는 하는데, ‘분노’는 여느 감정과 다를 거 없는 기초 방어기제 중 하나다. 공격이라는 행위 자체가 방어의 극대화된 모습이랄까. 위협을 느낀 동물이 으르렁대듯 결핍이 생길 상황을 인지하고 생존법을 발동하는 것. 오히려 위협에 처한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고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하는 게 위험천만한 상태 아닐까. 사랑, 즉 감정이 있는 그대로 존중되느냐가 결핍의 생성을 결정한다면, 분노는 다스리는 법을 이리저리 시도해 가면서 나만의 생존법을 터득한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때 여러 모습의 방어기제를 얻는다. 객관화에서 가장 만만찮았던 건 생존하기 위한 발악조차 포기하고 무뎌진 감정들이었다. 고의로 자극하고 애써봐도 느끼지 못하게 된 감정은 이성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가로막혔다. 객관화는 고통의 상실이 아니라 모든 감정을 오롯하게 느낄 능력을 되살리는 심폐소생술이었고, 그곳으로 가는 통로에 길을 터주는 게 주요 과제였다.     


언제부턴가 분노가 상실된 감정은 거친 불안감으로 자리했다. 이외에도 무방비 상태에서 한동안 걷지 못하게 만드는, 일명 똥침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업그레이드된 장난은 온갖 경계를 품게 했다. 이미 해놓고 그들은 웃으면 장난이다. 화내면 예민한 사람이다. 장난의 사전적 의미는 ‘짓궂게 하는 못된 짓’인데. 그럼 “에이. 그냥 장난인데 왜 화를 내?”라는 말은 “그냥 짓궂게 못된 짓을 한 건데, 왜 화를 내?”라는 말 아닌가? 어째서 자신을 지키려는 행동이 예민이고 유난인지. 영향은 받고 싶어서 받는 게 아닌데

. 굳이 힘들어하면서 눈치 보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싶을 리가 없다. 이제 안 일어날 것도 알고, 나를 깎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미 상처는 습관이 되었고, 성격으로 자리하였으니 아무렇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주관적 평가로 인해 남겨진 흉터마저 대수롭지 않은 걸로 여겨진다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억압에 억압이 이어지듯 콕 찍힌 잉크처럼 흉터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번져가는데.

   성인이 돼서도 누군가와 화장실을 갈 때면 심리적 압박감에 볼 일을 못 볼 때가 더러 있었다. 그 덕에 회사 회식에서는 취한 취급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함께 화장실에 갔다가 뒤로 빠져서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배들이 나를 찾으러 다니더니 화장실 칸 위로 점프해 위치를 확인했다. 실은 칸 위로 장난삼아 올라오거나 휴대전화를 들이미는 그런 애들도 있었던 터라 칸막이 천장이 뚫려있으면 그마저도 불안하다. 그렇게 증명받은 직관은 나만의 공식으로 자리하면서 내일의 내일까지 영향을 남겼다.

   ‘장난’

   ‘가벼운 장난’

   ‘그냥 장난’

   수많은 괴롭힘이 앞선 단어들로 포장된다.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약하고 작으니까 은근슬쩍 건들어 보고. 그런 나는 결과가 보임에도 나약하게 비추어지고 싶지 않아서 대항했다가 다툼이 일어난다. 그때 내가 어땠었는지 그들은 모를 거다. 영향받는 건 피해자인데 왜 가해자 감정에 맞춰 의미를 결정지을까. 우리는 어디까지 용서하고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확실한 건 하나다. 왜곡되지 않은 현상이 기준이어야 한다는 것. 세상에는 온갖 주관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줄 판사가 필요하면서도, 정녕 그게 맞는지 혼란스럽다.  

    

   나는 재발할 사건이 아니라서 꽤 괜찮아졌다. 하지만 트라우마 사건이 재발할 우려가 있는 이들은 하루하루가 얼마나 큰 공포일까. 실상 피해자가 다시 상처받게 만드는 세상도 탓은 없을까. 약속해 놓은 원칙을 지켰다는 이유로 쏟아지는 찬사와 기사들. 쉴 새 없이 불어나는 강한 휘발성의 의미들과 부정적인 뉴스로 가득한 세상. 그 흐름에 시답잖은 걸로 경쟁하고, 싸우고 이간질하고, 특히 당사자 없는 싸움을 치르느라 바쁜 존재들. 비호감이 된 진실 앞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에 징까지 울리면서, 한 맺힌 태평소마저 불어댄다. 정말 화난 건 맞는지. 일단 화부터 내는 그들의 세상이 부정적인 뉴스로 가득한 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현상과 의미를 분리하고 본질에 집중하면 그토록 바라던 평온한 삶이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그들의 이분법적 세상은 사회화된 의미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렸다.

   습관처럼 소원을 빈다. 세상이 바뀌게 해달라고. 하지만 침묵을 유지한 채 바라기만 해서는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었다. 나는 미워하지 않기 위해 참지 않기로 했다. 물론 내가 나서기로 한 길에서는 오는 사랑만 지고지순하게 받아들이며 한마디라도 더 아끼는 게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불편한 진실을 꺼내어 배부르게 욕먹기도 했던 여느 때처럼 올바르다고 생각한 행동이 반대로 어떤 미움을 살지는 모르겠지만 뱉는다. 아는 사람은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조금은 단단해진 작태로. 그러한 여정 또한 최상의 우주에 한 움큼 더해본다. 현 세상에서 자기 견해를 꺼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하나 더 아는 듯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고, 그건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딱 그 정도 힘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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