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독 Oct 18. 2023

아니 땐 굴뚝에 난 연기는 누구 입김이었나

앞니 2개 실종 사건

 “아, PTSD 온다.”

   언제부턴가 곧잘 들리는 말이다. 특정 상황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이야기할 때 가벼운 농담처럼 쓰이는 이 말이 나는 좋으면서 싫다. 싫은 건 누군가의 아픔이 별거 아닌 걸로 치부될까 하는 오지랖성 걱정이지만, 한편으로는 트라우마라는 게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걸 퍼트려 주어서 반갑다. 삶이라는 시간에 만들어진 우리는 이미 수많은 트라우마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에는 개인이 순탄히 감당하기 힘든 사건도 있겠지만, 대다수 트라우마는 타인들이 ‘겨우 그거?’라고 생각할 만한 사소함에서 발단되었다. 또 사소함이라는 기준은 매우 주관적이니까, 모든 계절의 기억은 나의 살아감을 완전히 뒤바꿀 정도로 영향을 미친 인생의 주요 사건이었다.     

   제일 부러운 사람이 있다. 눕자마자 잠드는 사람 그리고 꿈 안 꾸는 사람. 꿈은 무의식의 드라마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꿈꾸는 나는 자연히 깨어난 게 언제인가 싶다. 야속한 선잠마저 깨워낸 건 불규칙적 시차 알람도, 엄마의 잔소리도 아닌 약속한 듯 선점한 꿈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게 마냥 설레고 좋은 줄 알았는데, 깊게 잠들면 안 꾼다니! 누구는 뒤통수에 스위치가 있어서 누우면 잠들고 눈 뜨면 아침이라고 한다. 왜 나는 그 스위치가 없을까. 만나는 꿈의 형태도 매번 거기서 거기다. 간헐적으로 이가 빠지고 부러진다. 무언가에 쫓기고, 모험하고, 사람을 만난다. 수없이 반복된 꿈에서는 의식에서 준비한 대처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자각몽에도 여전히 작동하지 않는 브레이크에 두려움은 더욱 깊어간다. 이쯤 되면 적응할 때도 된 거 같은데… 모르겠다.     


   초등학교 5학년 늦가을, 실제로 나는 앞니가 부러졌다. 말대답하지 않도록 입술을 굳게 다무는 업무를 담당하던 앞니가 무려 두 개씩이나 날아갔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항상 눈치만 살피던 나는 어느 날 동생 따라 컵 스카우트에 가입했고, 첫 체험학습을 떠났을 때였다. 어딘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산지대였고, 당일치기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첫날 숙소에서 잠들기 직전 일이 터진 거다. 처음 만난 친구들과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던 나는 ㄷ자 모양 소파 옆을 잽싸게 지나갔고, 때마침 지호라는 친구가 일어나면서 팔꿈치를 크게 휘둘렀다. 반에서 제일 큰 애와 제일 작지는 않지만, 교실 두 번째 줄쯤 앉아있는 애. 또래 친구들보다 덩치 큰 지호에 비해 내가 너무 작아서였는지. 웬일로 조용했던 입을 망치로 내려친 듯 정신이 멍했고, 눈을 떠보니 아랫앞니 두 개가 없었다. 이런 서프라이즈. 심지어 앞니만 새로 자란 거였는데. 그것도 얼마 전에…

   이날 선생님께서는 산 위라 통신도 잘 안 터지고, 일정도 많이 남았다면서 기다리라고만 하셨다. 얼른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은데, 허락해주지를 않으니 다음 날에도 가지 못했고, 이가 시리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추로스… 정말 맛있어 보였는데. 참으면서 혼자만 애처로이 집 갈 시간을 기다렸던 장면이 스친다.     


   어느덧 16년이 흘렀다. 하지만 지호의 가벼운 사과나 ‘괜찮냐?’ 같은 위로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옆을 뛰어갔으니, 지호의 과실만은 아니었고, 명백한 쌍방이었다. 그래서 밉기는커녕 그의 불안한 눈빛이 가끔 아른거린다. 지호 부모님이 지호에게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말라며 타이르는 걸 어쩌다가 포착하였고, 남의 불행에 기쁨을 느끼는 샤덴프로이데가 아닌 이상 지호도 오랜 속앓이를 하지 않았을까. 이후 거짓말처럼 우리 집은 유별난 집안으로 소문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선생님께서는 학교에서 사라지셨다. 사람들은 평소 조용했던 지호 측 입놀림만 주야장천 믿었고, 까부는 아이라는 이유로 잘못의 주인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아무도 묻지를 않으니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평생 앞니가 없는 건 난데, 왜 후폭풍까지 내 것인 걸까. 지호 부모님은 가만히 서 있는 지호 팔꿈치를 향해 내가 들이박았다고 주장하셨다. 솔직히 너무 한 게 내가 아무리 성장이 느렸어도, 지호 팔꿈치 높이만큼 작지는 않았다. 이래 봬도 내 앞에 한 줄이나 있었는데! 가만히 서 있는 친구에게 투우하여 이가 두 개나 부서지려면, 이때 나의 속력은? 육상 유망주였나. 갈수록 창의적으로 어! 이가 없다.

   게다가 사건에 쐐기를 박은 건 다름 아닌 현장에 있던 지호 친구였다. 갈등이 깊어지면서 다행히(?) 사실관계를 따질 기회가 생겼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친구는 지호 부모님 말씀이 전부 옳다며 수긍해 버렸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건 그들의 입김이었나. 우리 부모님께 듣기로 그때 지호 친구는 손과 몸을 심히 떨면서 증언했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지호네가 괘씸하다가도 그 모습에 괜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들 정도였고, 쓰라린 마음에 나머지 변론 과정을 그만두셨다. 요즈음까지도 그 친구에게 각인됐을 트라우마까지 걱정하신다. 이다음 소문이 났다. 전부 지호네에 돈을 받아먹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그렇다기에는 당시 요구한 건 하나였다. 우리 부모님은 단지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어 하셨다.

   “아이에게 사과 부탁드립니다.”

   한 사건으로 세 명의 아이는 각자 다른 모습의 트라우마를 가져갔다. 나는 꿈이었지만, 그 친구들에게는 어떤 형태로 남았을까. 그날부터 두 친구는 호적을 합쳤는지 쌍둥기 같은 빼닮은 눈치를 살피며 나를 피해 다녔다. 가끔 학교에서는 휘황찬란한 구설들이 들려오기도 했다. 진실은 다수로 인해 왜곡된다. 다수는 그저 여럿일 뿐인데 생각보다 거짓은 쉽게 진실이 되고, 진실은 거짓이 된다. 진짜가 무엇인지는 무작정 떠드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은커녕 나에게는 반 이상 아작난 치아 둘을 지키기 위한 여정이 펼쳐질 뿐이었으니까. 엄마와 나는 수많은 치과를 다녔고, 대부분 의사 선생님께서는 당장 임플란트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12살에게 보철 치아라니! 하지만 엄마는 몇몇 전문가 말에 그치지 않았고, 끝내 신경을 살리자는 치과를 찾아내셨다. 원장님은 일단 신경치료만 하고 임시 치아를 덮고서 어른일 때, 불가피한 순간에 크라운을 씌우자고 달래주셨다. 그날 충격은 치아 두 개뿐 아니라 다른 신경들까지도 다치게 했는데, 이 정도라서 다행일까. 매번 꿈꿀 때마다 되새겨지는 계절에 마른 땀을 흘리다가도 다행과 감사를 전한다. 정OO 치과 원장님과 엄마, 오래도록 버텨준 나의 치아에게.     


   나는 아무도 믿지를 못한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반에 분실 사고가 일어나면 금시초문인 사건임에도 무작정 자신을 의심하였다. 현실이 맞는지, 꿈꾸는 건 아닌지, 혹은 해리 상태에 빠져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 있는 건지. 분명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지만, 믿지는 못한다. 이때부터 기억에 대한 강박증이 나타난 걸까. 아직도 나는 학창 시절 같은 반인 적도 없고, 알 길도 없는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한다. 아니 기억하지 않아도 그냥 떠오른다. 요즘도 길거리에서 닮은 사람과 스치면 문득 그려질 정도로.

   “너 걔 어떻게 알아?”

   “몰라. 지나가다 본 적 있나 봐.”

   간혹 켜는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도 한 번이라도 말 걸어 준 사람은 이상하게 알아봤다. 생존법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메타인지는 과거 대부분을 내면에 기록하였고, 마인드맵이 삽시간에 펼쳐졌다. 경험과 세상의 정보로부터 학습된 경우의 수가 무한히 나열되면서 단순함과는 더할 나위 없이 멀어졌다. 그런 나를 잎새는 외장 하드로 애용하기도 했다. 얘는 나를 너무 잘 아는 게 큰 문제다.

   “그때 그거 뭐였지?”

   힌트라고는 표정뿐인 한마디에도 신기하게 직관은 적중하였다.


   잠깐인 줄 알았던 꿈과 그 안의 사건들. 그러다가도 연극처럼 암막이 걷히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다음을 살아가는 그들의 움직임에 내가 이상한 건지 의심을 이어간다. 변함없이 공격받고 쫓기고, 자신을 숨기기 위한 내면의 이야기도 쌓아갔다. 언제쯤 그 계절을 벗어날 수 있을까. 잊히기는 하는 걸까. 매 순간의 불안정함은 강박적인 완벽주의를 만들었고, 그런 일상의 연속은 무엇에도 몰입할 수 없는 피상적인 순간만을 파생시켰다.

   매일같이 찾아와 혼자에게만 소란스러운 적막의 밤. 도무지 눈 감고 지새우는 암흑이 익숙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꿈도 꾸지 말고 편히 자자고 들려올 때면 이내 가라앉기도 하는 요즘이다. 때로는 좋은 꿈이 내일의 시작을 환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겠지만, 기왕이면 당신도 꿈꾸지 않는 그런 검고 평안한 밤 맞이할 수 있기를. 매번 그렇게 말해주어서 더없이 고맙다고. 당신께 두 손 모아 바라야겠다. 오늘도 ‘꿈꾸말자’ 하기로.

이전 11화 부모의 원칙이 아이에게 끼치는 영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