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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18. 2023

부모의 원칙이 아이에게 끼치는 영향

참는 게 이기는 건 둘째치고

   아니, 내가 말 많은 이유는 소리 내지 못한 일주일 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대차게 혼났다. 왜 매번 내 잘못일까. 물론 내가 먼저 장난을 걸었다거나, 성질을 부렸다거나,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고집할 수는 없다. 하지만 늘 내가 잘못하지는 않았다. 깨물리지 않은 입술. 말하는 게 즐거웠던 이유도 고작 그거였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다. 동네에는 외할머니도 계셔서 초등학교 때까지는 사촌들도 함께 자랐다. 성질이 강한 사촌 누나와 해맑은 영혼의 사촌 동생. 우리는 아파트 네 단지 정도 떨어진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여느 형제처럼 수시로 놀았고, 그만큼 다툴 때도 많았다. 여전히 다퉜던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어린애들 싸우는 흔한 이유에 흔한 다툼 아니었을까. 이처럼 내가 느꼈던 둘째의 서러움도 흔한 집안 모습 중 하나였다. 싸우고 나면 우리는 주로 아빠나 외삼촌께 혼났는데 새초롬한 회초리로 맞기도 하고, 상체만 한 ‘WHY 시리즈’ 책을 여러 권 들고 무릎을 꿇거나 서 있기도 했다.

   싸운 후에 어떻게 혼나는 게 공평한 걸까. 책의 개수? 손드는 시간? 정답이 없으니, 모두에게 공평하기란 쉽지 않고, 실은 어떻게 혼나는지도 상관없다. 다만 정답이 정해져 있듯 돌아온 말이 ‘네가 참아야지.’라는 건 최악이었다. 내가 잘못한 날도 있고, 누나나 동생들이 잘못한 날도 있는데, 어느 날은 쌍방이거나 오해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이유 불문 결론은 나에게 참으라는 말이었다. 누나랑 싸우면 동생이라는 이유로 참아야 한다. 동생들과 싸우면 오빠니까, 형이니까 참아야 했다. 누나 말 들어야지. 동생부터 챙겨야지. 형·오빠니까 당연히 참아야지. 그럼 나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 차라리 잘잘못을 정확하게 따져 잘못한 크기에 알맞게 혼나거나 스스로 변론할 기회라도 줬다면 좋았을 텐데. 나의 언어는 곧 말대답이었고, 이 다툼이 누구 잘못인지는 우리를 혼내는 그들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니 싸웠던 이유도 기억날 리가 없다. 내 생각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고, 물어봐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7남매 중 넷째로 자라온 아빠에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대꾸는 안된다.’라는 원칙이 있다. 그건 의도치 않게 아이의 감정을 희생해서라도 지켜야만 하는 아빠의 교육방식이다. 설명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초강력 접착제처럼 떼어낼 수 없는 고정된 원칙이 이해가 안 돼서 가끔은 억울함을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언제나 말대꾸였다. 처음에는 이유가 있겠지.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그 대단한 이유를 도저히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반문하더라도 어린애 입장이 그리 논리적이지는 않았겠지만, 무작정 우긴다거나 편을 들어달라는 것은 아니었고, 때로는 다툼에 대한 변론도 아닌 한 번만 들어봐달라고 사정하는 내가 웃겼다. 억울함을 벗을 기회는 나에게만 존재하지 않는 모순된 규칙이었을까. 왜 내 말은 꺼내기도 전부터 오답으로 정해진 건지…

   지금에서야 ‘7남매 중 넷째’라는 키워드로 자초지종을 추측한다. 애석하게 태어나기도 전부터 내게 생길 결핍은 결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커서는 모두 어릴 적 관점이라 나에게 권했던 원칙을 누나나 동생들에게도 적용하지 않았을까? 고민해 봤지만 ‘안 했겠구나.’라는 확신으로 끝맺었다. 왜냐면 그들은 아직도 그때 이야기가 나오면 다른 애들은 벌주면 그대로 받았는데 나만 혼나는 와중에 겁 없이 의사 표현했다면서 나무란다. 책을 한 권 더 들고, 벌 시간이 연장돼도 단 한마디 꺼내고팠던 이유는 여전히 관심 밖이었다. 단지 그들에게는 벌 받는 도중 두 입술을 떼었다는 행위만이 중요했다. 나중에 알게 된 건 어떻게든 결백을 밝히고 싶었던 나와 달리 여동생은 상황을 빨리 넘기고 싶어서 최대한 조용히 있었다는 거다. 같은 상황에서도 각자 묻어남에서 비롯된 방어기제는 달랐다. 이후에도 동생은 부단히 입을 다물었고, 20대 중반 무렵이 되어서야 뒤틀린 기억을 가다듬었다. 반면 회피적인 태도를 보이던 여동생과 달리 나는 무작정 억울함을 삼키고 잘못됨에 순응하는 게 싫었다. 아무 말도 꺼내지 않으면 전부 참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떠한 생각이 무른 이성을 방문할 때면 작동하는 보안 프로그램에 내뱉어도 될지 말지, 삐뚤어진 입술을 꽉 물어댔다. 철통 보안을 뚫어내는 데 기어코 성공하더라도 가라앉는 포물선을 그려내어 먹는 소리를 내기 십상이었다.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대사를 인용해 본다. 그들이 나한테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면, 나는 내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틀린 게 당연한 사람이 되는 거다. 삼백안인 내 눈이 치켜보는 것 같다는 어른들의 시선으로 인해 저지른 잘못이 되고, 턱 들고 내려다보는 게 습관이 된 것처럼. 여느 왼손잡이처럼 말이다.  

   

   앞서 말했듯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자유롭게 표현함으로써 자아를 형성해 간다. 하지만 그 감정과 본질이 무시된 채 특정 프레임에만 맞춘 교육이 진행된다면 아이의 내면에서는 조용히 분리가 일어난다. ‘오빠니까 참아야지.’에서 ‘오빠인데 참지 않는 건 잘못된 거야.’로. ‘말대꾸하면 안 돼.’에서 ‘마음을 표현하는 건 잘못된 거구나.’로. 정답이라는 기준에 오답이 구분된다. 간혹 사전적인 정보 부족으로 뒤엉킨 인지 왜곡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처럼 부모의 가치관이 아이의 이성을 거쳐 무의식으로 스며드는데, 혹여 그것마저 모순이 생긴다면 아이의 내면은 온갖 혼란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게 상처받은 아이의 생존법이다. 이해받지 못하고 부정 받은 표현은 재차 감정을 느꼈을 때 자신을 의심하도록 한다. 감정에 충실했던 나는 잘못된 표현법을 가졌던 나로 무의식에 저장되었다. 그때 생긴 상처는 연속된 방어기제로 억압이라는 최후를 맞이하였으며, 그런 부자연스러운 익숙함을 이윽고 당연함이라 착각하였다.

   또한, 이러한 진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때 불안에 허둥대느라 매몰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유도 묻기 전에 말대꾸부터 하지 말라고 하시던 우리 아빠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 행동은 아빠의 미워할 수 없는 투사였을 거다. ‘투사’는 자기 특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다른 주체에게 원인을 돌려 감정을 정당화하는 방어기제다. 어느 날은 한 사람을 보고 답답해서 짜증이 났는데, 누군가는 같은 사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느끼는 부정 감정은 대체로 투사였고, 그것은 내 결핍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신호였다. 아무도 던지지 않은 돌에 피해 호소만 속출하는 아이러니랄까. 만약 나를 고차원적으로 괴롭히고 싶다면 억울함에 빠트리고서 입을 막아버리는 게 최상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대꾸하지 말라고 말을 끊기 전에 억울함을 전해야 했고, 말이 끊긴 후에 남는 건 내면의 상처와 답답함이었으니까. 이후 나는 성격이 급하고 답답한 걸 견디지 못하는 존재로 자리했다.   

  

   이제는 남이 잘 밉지도 않다. 찾아오는 사사로운 감정들까지 전부 내 것이니 그대로 인정하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감정은 긍정과 부정을 넘어 다른 잣대로도 나뉜다. 홀로서 존재 가능한 감정과 남으로부터 반사되는 감정. 후자는 이성을 통해 가공되었을 가능성이 확연하니 몇 꺼풀 더 벗겨 본질을 파헤쳐야 했다. 열등감도, 질투도, 시기심도, 정반대 긍정 감정들까지도 주체를 알려주는 묻어남일 뿐, 자신에게 이유가 없다면 무엇도 나를 동요시킬 수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나처럼 마음속 어린아이를 오래간 품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랬는데, 지난날을 알아가다 보면 상처 준 그들이 밉다가도 이해가 됐고, 어느샌가 존중에 이르렀다. 악인의 서사를 듣고서 전의를 잃듯 마음이 몽글했다. 다를 거 없이 모두가 의도치 않게 영향받아 만들어진 똑같은 인간일 뿐이니까. 다만 여유 잃는 날이면 언제 또 어떻게 미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존중이든 공감이든 그 여부는 온전한 자기 선택이라는 것. 과연 자신을 위한 게 무엇일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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