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만 아저씨
한참 멀었다. 옛날에는 이 나이면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적어도 어른은 되는 줄 알았는데.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결핍을 만들어 간다. 단 한 순간도 완전하지 않으며, 그나마 태어나기 직전이 완전한 순간일 거다. 우리는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
객관화할 시점에 나는 연극영화를 전공한 대학원생으로서 캐릭터 분석을 연구하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갈수록 무언가 익숙했고, 연구할 때 바라보던 관점이라는 걸 알았다. 다른 캐릭터를 바라볼 때는 잘만 하던 걸 왜 나한테 적용할 생각은 못 했는지. 이 또한 내가 만든 필연은 아닐지. 각종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처럼 나라는 인생도 일인칭 시점을 가진 한 편의 영화였고, 나도 한 명의 주인공이었는데 말이다. 그걸 깨달은 나는 세상의 힌트들과 더불어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직접 분석해 보기로 결심했다.
캐릭터를 분석한다는 건 그 캐릭터, 즉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망각한다. 인간도 동물이고, 동물의 가장 큰 특성은 ‘생존’이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선택은 생존하기 위한 발악이었다. 대부분 성격은 그런 욕구가 자극되어 생긴 방어기제의 활약으로 형성된다. 하나의 존재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한 치 망설임 없이 방어기제라고 답할 것이다. 정신적 안정을 깨는 행위라면, 그것은 극심한 자극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결핍으로 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다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행동을 취한다. 수시로 소지품을 확인하거나, 지퍼 있는 옷을 입거나, 아예 그럴 일이 생기지 않게 집에 물건을 두고 다닐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반응은 이전 환경에서 만들어진 묻어남, 즉 어떠한 관찰자를 만나고, 어떤 결핍을 가졌느냐에 따라 상이하게 발현된다. 같은 순간에도 누군가는 아무 일 없듯이 무심하고, 또 누구는 간단한 대처로 파고드는 불안을 떨쳐버린다. 그와 달리 큰 위협을 느낀 누군가는 특정 방어기제를 선보일 것이다. 그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무의식으로 남아 또다시 반복과 함께 굳어지면서 잠정적으로 성격이 된다.
결핍->행동->반복->습관->행동->반복->성격
따라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현재 가진 성격들이 어느 결핍으로부터 탄생한 건지 거꾸로 유추해 내는 일이었다. 성격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그냥 모든 묻어남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찾는 방법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것들에 의문을 품고, ‘왜’라는 질문을 줄줄이 던지면서 과거의 과거까지 찾아가면 된다. 이성을 가진 우리는 타임머신 없이도 언제든 플래시백 하여 장면을 돌릴 능력을 갖췄다. 그렇게 특정 감정을 언제 처음, 무슨 이유로 느꼈는지 가장 깊은 무의식에 숨겨진 본질을 찾고,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 와 바라봐 주고 인정해 주는 연습을 하는 거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만큼 행운이 없다. 늦게 알수록 조금은 더 먼 여정을 떠나야 할 테니까. 우리가 찾아내는 게 결핍이다 보니 다시금 느끼는 감정이 좋거나 아름답지는 않아서 잊었던 기억에 아플 때도 있다. 하지만 방치된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자신에게 재차 상처 입히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감정이 자유를 찾도록 마음을 두드리는 일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왕이면 흘러넘치는 감정 자체에 집중해 보면서 말이다.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또 그것대로. 제때 아파하지 못하고 억눌린 상처는 지금이라도 충분히 느껴줘야 했다. 결핍의 흔적을 메울 수 있는 건 오직 외면해온 나의 감정들뿐이었으니까. 우리에게는 과거보다 다음 우주로 나아갈 현재가 중요하고, 어느 순간 되돌아본 감정에 대해서는 여유로워진 나와 마주할 것이다. 우리에게 극복은 그날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다시는 같은 아픔에 매몰되지 않도록 선택할 여유를 갖는 거였다. 불안을 벗고자 평생 방어기제를 내세우며 순간적인 회피를 정답이라 오인했던 나는 이제야 바람직한 극복을 택했다. 그러한 기대를 빌려 지나간 계절을 재차 살아낼 객관화의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또한, 우리는 감정적 힘듦을 겪을 때 대개 앞서 떠오르는 기억들, 눈앞의 사건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하지만 대부분 퍼즐 조각은 잊고 있던 어린 시절에 만들어져 그림자에 뒤덮여 있었다. 성격이 만들어지던 시절 가장 큰 특징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 주인공 ‘라일리’처럼 어린아이라는 점이다. 이성이 형성되기 전 아이는 무엇보다 본능적인 욕구가 월등히 강하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받아들여지면서 자신을 만들어 간다. 그 과정을 통해 자기라는 존재를 조금씩 인식하고 세상에 대한 신뢰와 안정을 쌓아가는데, 혹여 그런 환경이 지켜지지 못한다면 아이의 감정은 각양각색 방어기제로부터 억압되고, 오롯하게 느끼는 법을 잃는다. 그 뜻은 어른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이가 모든 것에 현상으로써 영향받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필 아이에게는 엄마의 부재같이 누군가 사소하다고 여길만한 것들까지 가혹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관련 학자들은 아이의 기초 성격이 언제까지 형성되는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말하지만, 몇 살씩 차이가 나도 결국에는 유아기 시절이라는 공통된 이야기를 한다. 물론 지금에도 우리는 영향받아 변화를 겪지만, 추측하기로는 현재의 움직임마저 그때 만들어진 내가 하는 반응이라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그 때문에 어떤 이의 아픔도 함부로 판단할 수가 없으며, 아이나 여타 동물같이 이성이 갖춰지기 전인 존재는 외부에 해를 입히는 특정 상황은 제외하더라도 웬만해서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완벽하게 존중받기란 쉽지 않다. 어떤 부모님이든 부모 전에 한 사람이기에 이미 환경에서 만들어진 결핍이 있고, 윗세대가 만든 의미를 정답인 양 주입받아 살아왔다. 이에 만들어진 가치관으로 아이의 가장 큰 관찰자 역할을 하면서 대대로 결핍을 물려주는 악순환이 발생하기도 하고, 과거를 돌아볼 때 유독 가정환경에서 생겨난 묻어남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부모와 아이에게서 닮은 점이 여럿 보이는 이유도 타고난 기질을 넘어 환경적인 시간이 더 크다고 본다. 겨우 그 짧은 시절이 인생을 결정지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매듭 전에는 알 수 없는 결말이지만, 아이는 그때 생긴 결핍과 가치관으로 인생의 방향성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모든 선택은 망가진 애착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한 본능이고, 기억하는 시점부터 이미 방어기제라는 이름의 생존법을 타고난 것인 양 사용하고 있었다. 무의식으로 자리 옮긴 상처들로부터 짜인 각본에서 좀처럼 개연성을 찾지 못하는 건 내가 이상한 것도 비정상적인 것도 아닌 그저 시간의 착오였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결핍을 안겨준 세상을 미워할 것인가에 대해서. 만일 모든 걸 줬대도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앗아간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일 건가에 대해서. 지금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감정에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고 계획을 세운다. 결핍 속 90%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하여 생애 첫 순간부터 살아온 모든 찰나를 되돌아볼 예정이다. 그곳에서 지난겨울 유난히 아팠던 이유와 그동안 어떤 영향으로 어떤 내면을 만들어왔는지 나만의 맥락을 찾고, 오래도록 갇혀있던 여러 모습의 어린 자신을 발견하여 바라볼 것이다.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나도 그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의 어떠한 욕구와 어린아이의 타고난 무언가를 바꾸었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봐 주기로 했다.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과거일 뿐이고, 악의 없던 그들은 내가 이런 영향을 받을 줄도 몰랐을 테니까. 오히려 그 덕에 수많은 능력을 갖췄고, 누릴 행복을 알아가기도 했다. 바라건대 당신도 나라는 영화를 단지 객관화를 위한 한 편의 진심으로만 바라봐 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사람들은 왜 영화·드라마 속 등장인물 서사에는 진심이면서, 정작 스스로와 주변인들 인생 서사에는 무관심한 걸까. 우리도 해피엔딩을 기다리는 하나뿐인 주인공인데 말이다. 향후 일상이나 묻어남 속에 느낀 감정이 무엇이래도 좋다. 분명 그건 친애하는 자신이 숨겨진 이유를 찾도록 스스로 건네는 힌트일 거니까. 원래 오르막은 두렵고, 익숙함에 맞서는 건 불안정하다. 그런데 그 너머에 목표지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어느 순간 두려움이 설렘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민감함이 때로 감각이 되고, 천진함이 때로 무지로 비추어지듯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사랑, 설렘, 기쁨 등 모든 쾌락적 감정은 불안정하니까. 세상이 알려준 안정에 속아 자신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예측 가능한 시스템적인 안정들이 억압의 결과는 아닌지, 얻을 것이 아닌 잃을 것만을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양가의 경계에 선 나는 이제라도 찾아오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 채 어떤 면이든 선택할 자질을 가지기로 했다.
이 영화가 끝날쯤에는 당신에게도 여유가 깃듦과 동시에 스스로 진정 사랑하는 법을 터득했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나둘씩 필요한 결핍을 다 충족하고 우리는 각자가 정한 최상의 우주에서 다시 만나는 거다. 나를 사랑하는 것에 늦은 나이는 없다. 혼자가 아닌 여정이니 부디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괜찮다면 서로의 관찰자가 되어 각자의 의미를 나누는 여정의 동행자가 되어보는 건 어떨지.
이 영화가 100분짜리라면, 주인공은 한참 많은 이야기와 선택을 남겨두고 있다. 지금 흘러나오는 장면이 엇갈린 결말을 바꿀 수 있는 회상 장면이라면 당신은 어떤 색의 해피엔딩을 만들어 갈 것인가. 내려두고픈 이 찰나가 앞으로 가장 연연할 과거가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는가. 분명 우리는 아직 어린 시절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