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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19. 2023

MBTI 중독자들의 습관적 거짓말

MBT(M)I

   잘 주는 사람과 잘 받는 사람이 있다. 자신한테조차 받을 줄 모르는 나는 주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다. 어릴 적 내 용돈은 일주일에 오천 원이었나, 칠천 원까지 올랐었나. 그걸로 동네라는 자그마한 사회를 살아왔다. 지금은 국밥 한 그릇도 사 먹기 힘든 금액이지만, 그때는 발바닥 돈가스가 300원, 피카츄는 500원. 그래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사이쯤 적은 돈은 아니었고, 어차피 문구점 리듬 오락기나 피시방 말고는 돈 쓸데도 없었다. 선물할 뿐이었다.


   항상 누군가의 생일을 기다렸다. 특히 선물 고를 때가 가장 설레었는데, 유독 일회성으로 증발하는 선물은 꺼렸다. 내가 준 선물이 한순간 기쁨을 선사하고 잊히기보다는 잔잔하더라도 오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흔적을 남겨 오래 기억에 남고 싶었던가. 주로 나는 ‘인간관계’ 관련한 책이나 직접 만들어 주기를 즐겼고, 요즘에도 손수 전할만한 선물을 우선순위에 두지만, 어쩔 수 없이 기프티콘을 보낼 때는 영양제 같은 걸 고르게 되니 말이다. 그러고서는 돌아올 그들의 반응만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받는 게 어색한 사람은 주는 걸 아무리 좋아한대도 제대로 주기는 쉽지 않았다.

   사실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존재 가치를 느끼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애착 베개가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아이처럼 애착 대상에 대한 의존성 강화는 점차 중독으로 모습을 바꾼다. 차라리 술이나 담배처럼 자신에게 주도권이 쥐어진 경우라면 다행일까. 남을 챙기고 도우며 행복을 얻고, 자기 선택보다 남 시선에 비중을 두고. 이처럼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게서 중독이 생긴다면 부정 반응을 보이거나 그들이 떠나는 불상사가 발생했을 때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는 끔찍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과연 선물이라는 행위가 좋았던 건지. 존재를 꾸준히 증명해 줄 대상이 필요했던 건지. 아니면 받고 싶어서 하는 은근한 표현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안정을 얻으려 타인을 이용한다. 자신과 타인을 나누고, 특정한 이미지나 성별, 학교, 직업 등 무언가로 정의되길 원치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모르는 사람이 만든 각종 심리테스트나 정의로 판단되기를 갈망하면서 중독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요즘에는 뭐만 하면 MBTI. 이 검사는 정신의학자 융의 이론을 토대로 만들어진 심리학적 지표라지만, 그것도 반쪽짜리인 게 사람들은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탐구하지 않는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사람을 단정 짓는 건 수식의 결괏값만 보는 것과 같달까. 단지 현재 성향을 보여줄 뿐인 이 테스트에서 그들은 정작 해석을 결정짓는 각 성향의 분포도마저 넘겨버리고 4가지 알파벳만 신경 쓰고 기억한다. 또 잘못된 해석을 어디선가 주워와 흡수하더니 그것에 초점을 잡고 몰입하여 낙인시킨다. 심지어 나는 한때 4가지 모두 50% 안팎을 맴돌았고, 지금은 정반대 MBTI로 바뀌었는데. 기억에 따라 어떤 결괏값을 끼워 맞추든 그럴싸하지 않을까.


   아마 심리테스트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 3가지 유형일 것이다. 다들 하니까 궁금해서. 우리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마지막은 나 같은 유형. 타인과 다른 자신에 대한 의구심에서 묻어난 불확실성을 확신으로 바꾸고 싶은 사람들. 그들은 특정 유형으로 자신을 정체화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에도 있었구나.’ 재미라고 말하지만, 어느새 남이 알려준 정의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소속감까지 찾으면서 느껴버린 안정에 중독되어 있었다. 선물에 반응해 줄 사람을 찾고, 타로나 사주로 미래를 예측하고, 잠깐이라도 객석을 채워 줄 관찰자를 찾는 것처럼. 순간의 자극적임에 안정을 느꼈다는 이유로 남몰래 의존성을 키워갔다. 일시적인 안정인 줄도 모르고 올라가 버린 도파민 수치를 따르면서 그에 파생되는 더 큰 쾌락을 좇았다. 대체로 결핍은 두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했던 이전 상태를 도로 찾아가거나 극도로 회피하거나.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입에 무언가 자꾸 넣어야 할 것만 기분. 즉, 자신이 아닌 환상을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정답은 없다. 그럴싸해 보이는 유사 과학도, 논리적인 듯한 어떤 학문에서도 감히 나를 정의할 수는 없다. 어찌 고작 그걸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수십억의 존재를 분류할 수 있을까. 더욱이 세상도, 사람도 끊임없이 변해가는데. 그 속도도 점차 빨라지는데. 변하는 걸 정의한다는 자체가 무모한 짓은 아닌지.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채로 하는 설문이 신빙성을 가졌을지도 의문이다. 당연함이 된 프레임은 어느새 현상을 잊게 했고, 그 이상의 사고를 막아버렸다. 언젠가는 무의식 또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경험하기도 전에 다 안다는 듯 판단해 버릴 테고, 모든 가변성마저 무너뜨려 스스로까지도 기어이 틀에 가둬버릴 것이다.     

   어떤 존재든 특정 단어로 대체 불가능한 유일함이며 그 자체로 고유하다. 요즘은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이름만 슬쩍 흘리곤 한다. 혹여 다음 물음이 돌아오면 우리의 대화는 이어진다. 외부와 약속해 놓은 나라는 정의는 이름뿐이었고, 참고 지표들은 말 그대로 서로를 더 이해하고 존중하도록 돕는 도구쯤 되려나. 누가 뭐래도 나는 나만이 정의할 수 있었고, 그마저도 끝없이 변해갔다. 중독된 걸 내려놓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메타인지가 잘못 각인하여 머무르지 않도록 현재 상태가 어떤지, 어떻게 변해가는지 자신을 알아야 했고, 받아들이면서 다음을 선택해야 했다. 객관화와 똑같았기에 관성이 잦아들 때까지 견뎌낼 인내가 필수 불가결했다.

   원래부터 그런 건 자연에서 흐르는 자연스러움뿐이다. 한 사람, 한 가지의 의미는 다채로운 주관과 여러 경험을 지나 기억으로 임시 완성된다. 어느 순간 찾아온 답에는 이전 물음들이 빠져있었고, 이유 빠진 말은 헤아려지기 전까지 파동으로 두는 습관이 생겼다. 보기에 친절하다면 좋은 것이고, 투박하다면 잘못된 것일까. 자연의 법칙은 온전한 자연일 때나 존재했으며, 인간의 의미가 개입되는 순간 변형돼 힘을 잃어버리고는 한다. 그 기반은 비슷한 현상이겠지만, 다른 기억이 더해진 우리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필연적이었다. 차라리 그동안 100문 100답이나 하면서 스스로 정체화해보는 건 어떨지. 요약본보다 서로의 넘침을 펼쳐보는 건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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