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디
성인이 되기 전에는 진로를 정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막바지에 급히 전공이라는 목적지를 수소문했다. 하고 싶은 게 없는 것도 억울한데,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가는 건 더더욱 싫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대학도 의무는 아닌데. 이놈의 학습된 의미. 그 시절 나는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주변 친구들과 기타 선생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처음 자신에게도 물었다.
“제가 좋아하는 게 뭘까요?”
답은 의외로 비슷했다. 대놓고 묻어나서 어쩜 자연스러웠을까.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걸로 호기심에 들었던 라디오에 푹 빠져있었다. 좋아하는 거니까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겠지. 선택의 기준이 억울함이라는 게 심히 아이러니했지만, 단순한 선택으로 고향을 떠나기로 했다. 이 걸음이 십 년 가까이 나를 애착 잃은 아이로 만들 거라고는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5년 전인 2008년. 우연히 켠 TV 속은 보라색 조명으로 가득했고, 그 아래 앳돼 보이는 한 가수가 기타 줄을 튕기며 <Officially Missing You>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사랑 시를 읊조리는 보름달 토끼 마냥 어디론가 시선을 고정하였다.
“와! 목소리에 연기가 깔린 거 같아. 무슨 느낌인지 알지?”
나는 이 가수가 라디오에서 부른 라이브 모음집을 손바닥만 한 전자사전에 모아서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다녔고, 그를 따라 사람들 앞에 기타 치고 노래하는 자신을 그렸다. 이 순간만큼은 답답했던 현실에서 벗어나는 기분이었으며, 그를 동경했다. 신기하게도 나를 이끈 음악들은 여러 악기가 어우러지는 밴드 음악이 대부분이었고, 불안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간지러운 선율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는 기타학원을 핑계로 야자를 뺐다. 강제라면서 왜 나만 빼주는 거지? 기타학원에 다녀야겠다는 근심스러운 통보 외에는 어떠한 말도 한 적이 없었지만, 알고 보니 선생님은 여러 악기를 다루는 내 진로가 음악 쪽인 줄 아셨다고 한다. 그렇게 사백 명의 동급생을 뒤로한 채 당당하게 야자에서 도망친 나의 루틴은 다음과 같았다. 학원 갔다가 집 가면 저녁 7시 30분, 밥 먹으면서 시트콤 보면 8시 너머. 이때부터 방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음악이 흐르는 라디오를 두 시간 동안 틀어놓고서 축구 게임을 했다. 슬프게도 구미에는 공중파 라디오가 나오지 않아서 얼마 전 스마트폰을 산 김에 문득 앱 마켓에 라디오를 검색했고, 맨 위에 등장하여 설치한 앱에는 <볼륨이 높여요>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만약 그날 TV를 켜지 않았다던가, 야자를 빼지 못했다던가, 그 시간에 게임을 안 하는 어떤 찰나가 틀어졌다면 우리는 마주했을까. 더 과거로 돌아가 성적 낮춰 가까운 고등학교를 고르고, 친구 따라 이과에 가는 선택도 있었다. 집단무의식과 결핍들도 한몫했다. 때마침 스마트폰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볼륨을 높여요> 디제이가 다른 분이었다면 라디오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의문이다. 우연은 맞닿아야만 필연으로 탈바꿈하니까. 이상하게 울렸다. 오늘도 보고 싶었어요.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예요.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진심이, 목소리가, 새로이 알게 된 세상의 존재들에 울었다. 적어도 라디오를 듣는 두 시간 동안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연은 뭉쳐버린 힘듦이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귀띔해 주었고, 그 후에 미끄러진 음악들은 먹먹했던 소년의 어깨를 위로하듯 토닥여 주었다.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가장 사랑스러운 감정이 공감이라는 것까지 가장 값진 선물로 남겨주었다.
공감은 비슷한 감정에 머무른 적 있다는 이유로 상대 마음에도 잠깐 머무를 특권을 준다. 도심 한복판에서 넘어졌다는 말에 아픔만 걱정하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 실수한 적이 없거나 같은 상황에 민망해 본 적이 없다. 오래전부터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말을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받은 게 지지였고, 내일을 간절히 탐구해왔던 나는 그들의 꿈을 무턱대고 도우며 응원했다. 나의 상상과 추측이 누군가를 판단할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지난 아픔은 나를 깊은 곳으로 이끌어 다른 이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결핍이 강할수록 커다란 동요와 충족을 느낄 수 있다. 결핍이 적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겠지만, 그만한 사랑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았고, 반대편에는 다채로운 행복을 느낄 여지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앞선 계절들은 지워야 할 기억이 아닌 소중한 자산이었달까. 그 안정을 내가 줄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 나의 자잘한 아픔이 누군가의 큰 아픔을 오롯이 감쌀 수는 없겠지만, 먼 계절의 시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담요처럼 한 조각이라도 덮어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 조금이 온몸에 온기를 가져다줄 수 있는 우리였다. 사연을 보내고, 선물을 나누고, 심지어 즐겨 듣던 라디오에는 기타 치던 TV 속 앳된 가수까지 없는 듯 언제나 있는 존재로 나타나 주었다. 그때부터 나의 우주는 온통 라디오였다. 중독은 자신을 받아 들어야 해결할 수 있다지만, 때로는 묻어두고 다른 긍정적 중독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라디오 PD가 되기로 했고, 서울로 올라왔다. 유튜브에서는 그런 위로를 나누는 ‘숨디’라는 이름의 플레이리스트 채널을 운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건 주목 공포증으로 사람들 앞에 설 자신이 없어서 내린 섣부른 판단이라는 걸 최근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고시원이 답답해서, 수면 잠옷 차림으로 습관처럼 나가 걷던 스무 살의 신촌 길바닥. 산책하다가 신촌 광장에 걸려 ‘팟캐스트 라디오 제작 교육’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발견했다. 방송국 오픈 스튜디오만 줄기차게 나들이하던 나에게 드디어 라디오를 경험할 기회가 왔구나. 그곳에서 나는 꿈인 줄 알았던 라디오 PD를 당연하게 지망했고, 디제이로서 자신을 뽐내는 누나들을 부러워하였다. 부러워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이상적인 모습이 PD가 아닌 디제이에게 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한 공동체 라디오 방송의 PD가 되었대도 애매하게 충족될 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무언가를 바라는 건 필연적인 절차였다. 때때로 ‘숨디’ 채널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까. 동일시의 뒷면에는 어떠한 이상을 뒤따라감으로써 결핍을 충족해 가는 순기능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게 애매한 방어기제로만 작용한다면, ‘나’가 아닌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만들어진 ‘너’라면.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근처에만 머무는 오류가 발생키도 한다. 그동안 꿈꿔왔던 선망들이 정녕 내 것이었을지. 그런 상태에서는 무언가를 이루더라도 껍데기만 남아버린 공허함의 허울로 가득 차 버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과 사람 사이 구심점이 되어 공감을 나누는 존재. 나를 향해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 그런 용기에 조심스레 내밀어낸 묻어남. 그리고 진심. 마치 나서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는 합법적인 오지랖의 공간이랄까. 전에 우연히 맞닿은 주파수가 쉴 곳이 되어줬던 것처럼, 넘쳐버린 마음이 흐르고 흘러 어떤 찰나 필요한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작게나마 그들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었다. 언젠간 나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수민 디제이. 숨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