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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19. 2023

나르시시즘은 맛집을 참 좋아합니다

두 셀럽의 차이점

   이건 부러움에 관한 얘기다. 나는 늘 부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여전히 쉴 새 없이 부럽다. 개학하면 반장 선거에 나가는 애들이 부러웠고, 축제 때는 장기 자랑에 나가는 애들이 부러웠다. 나의 반사신경이 부러울 때 가장 날랜 모습을 띠는 것처럼 그들의 출마도 당연해 보였다. 나는 모든 것에 적당한 재능이 있었고, 적당한 관심이 있었지만, 딱 하나 아주 뛰어난 게 없어서 그런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심지어 창피하게도 전교생이 누구나 안다는 이유로 날라리 같은 애들마저 잠깐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부러웠던 건 사촌 누나와 동생이었다. 누나는 운동을 잘해서 육상 쪽으로는 꽤 유망했고, 낯가림이 없어서인지 자유로워 친구도 많았다. 겉으로 티 낸 적은 없지만, 사촌 동생이라는 이유로 누나 뒤에서 관심받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만큼 스스로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도 모르는 나와는 정반대의 세상이었다. 요즘도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그때 누나를 따라 했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바뀌었을까? 뭘 따라 하기는 했는데, 왜 하필 안경 쓰는 거를 따라 해서 시력만 나빠졌는지.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시퍼런 거짓말에 짠 것처럼 동조해 준 돌팔이 의사 선생님이다.     


   구미에서는 일 년마다 ‘LG 드림 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열린다. 매번 알만한 아이돌 가수 몇 팀은 왔었는데, 오로지 무대 위에 몰입돼 빛나는 그들을 보며 몰래 부러움을 느꼈다. 그쪽 회사와 내 영어 이니셜이 같아서 그런가. 이 많은 사람이 저들을 보기 위해 한곳에 모이다니. 함께 무대를 바라보는 순간이 내 것이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이 부러움은 마트 문화센터에 춤추러 다니던 동생이 이쪽 계열로 나가길 바라는 소망으로 잘못 방향을 잡았다.

   “야! 너 오디션 나가볼래?”

   유난히 주변에는 이런 친구들이 많았다. 돌 박사 맹구처럼 좋아하는 무언가를 수집하거나 꿈이 선명한 친구들. 그들이 부러웠고, 신기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내가 할 수 없었던 것들일까. 반장? 장기 자랑? 유명인? 생각해 보면 부럽다는 말만 연신 외쳐댔지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들의 노력을 재능이라 폄훼한 것은 아닌지. 그들이 이루어 낸 결과만 본 채 어떤 시간을 거쳐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는 자그마한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부러움은 질투나 시기심 같은 감정과 표출방식만 다를 뿐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 유사한 감정이라고 한다. 포장된 시기심이 부러움으로 그친 건 억압의 익숙함과 착한 아이 강박에서 온 소심함 때문이었을까. 그것을 얻으려 노력한 적이 없는데 결과에 시기를 느끼는 것도 모순이었다. 불필요한 갈등을 겪더라도 강한 오기를 거쳐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마저 부러워했다. 때로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특정 집단을 공격하거나 악성 댓글을 달며 굳이 결핍을 뽐내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분노를 발산하는 대상은 자기 결핍을 가누지 못해 극심한 방어 태세를 취했을 뿐이며 자신에게도 늘 똑같았을 거다. 앙금 진 마음에 위태하다가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 관찰되지 않는 음침한 곳에서 주체못할 분노를 터트린다. 그들은 비교적 덜 위협적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을 찾아 감정을 옮기는 전위 방어기제를 대차게 뽐냈다. “널 꺾는다고 그 향기가 내 게 될까.” 노래 <사랑이었다> 가사를 선물하고 싶다.     


   내가 부러워했던 대상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인정받는 존재들. 찰나의 인정이 사랑이라는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시간 울고 있던 내면의 아이를 보살펴 줄 관심이 필요했던 걸까. 더군다나 며칠간 밤새가며 친구들의 자소서를 첨삭해주고, 타지에서 진행하는 오디션에 뒤따르면서 자기 일처럼 주변의 꿈을 도왔다. 그로써 일시적으로 해소된 불안은 오지랖의 중독까지 불러왔다. 동일시해 따라다닌다고 해서, 진취적으로 도움을 쏘아 그들이 꿈을 이룬다고 해서, 결국 내 것은 아닌데 말이다.

   한 번은 부반장 선거에 나간 적이 있었다. 반장 선거 때면 직접 손 들 생각은 안 하고 어렴풋이 누가 추천해 줬으면 좋겠다는 기대만 해왔는데, 현실이 된 거다. 다만 추천은 친구 장난이었다. 한 표도 못 받을까 떨려왔고, 혹여 되더라도 주목받을 상황을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장난의 의도를 벗어나 은근하게 당선을 바랐었는데, 의외로 한 표 차이로 떨어졌다. 다행이었다(?). 어떤 걱정도 현실화하지 않은 최선의 결과에 심호흡을 내쉬다가도 그날이 바뀔 뻔한 기회는 아니었을지 골몰해 본다. 처음 딱 한 번. 그 한 번을 깨트리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살면서 주목받을 기회가,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인정해 주고 손을 내밀어줬다면 오늘이 빨라졌을까.    

 

   나의 눈치에는 두 얼굴이 숨어있었다. 틀린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서 보는 눈치. 다른 하나는 마치 유명인인 양 다른 시선을 의식하는 것.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 보잘것없는 자신을 숨기고 싶었는지 수두룩한 관찰자를 둔 그들을 찾아내 동일시하였다. 마치 나라의 위상을 드높인 유명인을 받들면서 자랑스러워하는 ‘두 유 노 클럽’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그런 동일시는 원칙과 더불어 이분법적으로 그런 사람과 아닌 사람을 나누기도 했다.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사람과 멈추어있는 사람. 원칙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 대부분 나의 원칙은 시간 준수나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같은 부류의 대단히 기초적인 약속이었지만, 이와 다르게 그것만으로 따질 수 없는 어떠한 존재만의 특유한 가치인 경우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단지 정해놓은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 아니 강박해 왔다는 이유로 같잖은 선민의식까지도 스며들었다.

   “아니 지고, 이기고, 더 낫고 이런 게 없다니까?”

   평가라는 가치가 익숙해진 탓인지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 순위를 매기고, 다투고, 그 기준으로 자신을 채우기도 한다. 감정에도, 어떠한 의미에도 우열은 없는데. 비교하는 순간 선과 악처럼 없던 우등과 열등이 나뉘었다. 열등을 느끼다가도 누군가 기준에서 벗어나면 얕보고, 고작 원칙에 매몰돼 움직이고 있다는 이유로 우월을 느꼈다. 어쩌다 열등과 자만 사이에서 모순이 생겼다. 무작정 기준을 내세우던 그들에게 상처받고, 욕하고, 괴로워했던 과거는 어디로 갔는지. 나중에 가서는 종종 인정받고 시야가 넓어졌다는 이유로 몇몇 고향 친구를 답답해하며 오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무시하고 깔보던 이들을 향해 보상심리로 찾아온 투사였다.

   또 그런 기준의 강화는 선민의식을 넘어 자칫 한 사람을 나르시시즘까지 이끌기도 한다. 나르시시즘이 위험한 이유는 누구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느끼도록 하지만, 순간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마주할 때는 자신을 바닥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 모습마저 거짓된 이미지일 확률이 높으며, 시작이 닭이냐 알이냐 같은 의문이다. 열등은 의미로 기준을 만들고, 기준은 비교를 통해 열등을 탄생시킨다. 정작 중요한 건 이 뫼비우스 띠 안에서는 가짜를 키워갈 수밖에 없다는 것. 본연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서운 게 어딨을까. 내면의 공허를 채워줄 허상의 자아를 생산해 유일한 관찰자로서 의존하고, 이외 관찰자들은 충족 수단으로만 취급한다. 타인으로 인해 충족되는 허상의 자존감은 자기 공감과 합리화에만 충실한 나르시시즘이 되어 홀로 남겨지는 것도, 경쟁이 끝나는 순간 존재 가치를 잃는 것도 예견된 결말이었다. 온라인이 활성화될수록 실재는 사라져갔고, 당연함의 탈을 쓴 길들임에 압도되어 스스로마저 놓아버렸다. 자기 검증을 거치지 않은 그들은 언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며, 대외적인 허상을 행복이라고 소리친다. 정작 당연한 사람은 그걸 왜 과시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디에도 딱 들어맞는 진리는 없다. 정답이 없으니 평가할 것도 틀릴 것도 없었다. 우리가 힘들었던 건 단지 없는 정답을 좇았기 때문 아닐까.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알고 보면 학습되어 전수되고 있었다는 진실을 왜 알지 못했을까. 그들이 말하는 의미 중 스스로 정립한 것은 얼마나 있을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럴싸한 정답이 아닌 진정 스스로 바라는 이상은 무엇이었는지. 나르시시즘으로 도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나만의 현재를 만들어 갈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도대체 그동안 그들의 무엇을 그렇게까지 부러워했던 걸까.

   Celeb? 아니면 Self-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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