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해빠진 거짓말쟁이
“지금까지 잘 참아왔잖아.”
자기 의심으로 가득했던 아이는 기껏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감정은 원해서 오는 게 아닌데. 왜 감정까지 타인의 허락을 받아야 할까. 왜 내가 받을 영향에 타인의 시선만 신경 썼을까. 마주해 온 모든 게 선물이고 상처였다. 사랑, 끌림, 미움의 감정들이 지난 결핍으로부터 만들어졌다니. 자랑스럽게 여겼던 능력들이 겨우 생존법을 보여줄 뿐이었다니. 억울하고도 약 오른다. 인간 욕구 중에서도 한참 어린아이가 느낄 법한 최하위 단계의 욕구. 자연히 성장하지 못한 채 그런 생존법이 인생의 방향성이 된 아이는 제어 불가능한 방어기제에 쫓겨 어떤 선택을 해왔을까.
나를 사랑하기 위한 다음 단계는 ‘인정’이다. 마침내 대면한 결핍들이 어떤 모양을 가졌든 지나간 시절을 ‘그래서 그랬구나.’ 받아들이는 것. 최상의 우주로 가는 여정에는 이미 만들어진 조각들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말했듯이 극복은 과거라는 계절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유가 더해진 선택을 하는 거니까. 주춤거리던 디딤발로 온전히 바닥을 내딛고서야 다음 발이 움직였고, 그게 가능해졌을 때 자신에게 친절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었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슬플 때는 마구 울어도 괜찮다고. 내일은 더욱 자유로워질 나를 믿고 맡겨달라고 말이다.
세상의 기준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 사이의 약속, 누군가 정해놓은 갖가지 원칙들. 모든 규정은 의미화에 지나지 않고, 각자 환경에 맞추어 만들어진 원칙은 다 다른 게 정상이다. 국가, 지역, 학교, 집안, 작게는 사람 사이까지. 각각 규모만 다를 뿐 어느 환경에 속해있다면, 앞으로도 속할 거라면 그곳에서 합의된 원칙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학습되어왔다. 그래서 그들이 절대적인 답인 양 속삭이는 주관적인 기준들까지 원칙이라고 착각하였다. 누구와도 합의되지 않은 사회적인 통용어처럼. 특정 나이에 무엇을 하지 않는다고 틀린 사람으로 정의되는 것처럼. 약속되지 않은 가짜 원칙들이 무질서를 비집고 뒤섞여 있었다.
내가 ‘착한 아이’ 원칙을 만들어 간 것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솔직하고 활달했던 나는 틀린 아이였고,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 상처를 면할 수 있었다. 정답에서 오답이 구분됐던 것처럼 위협을 막기 위한 선과 악이 나뉘었다. 인성론을 논하기도 전에 그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점과 그들의 선이 내게 악일 수 있다는 진실은 인지하지 못했고, 생존법에 숨어서 현상이 들어올 작은 틈새마저 막아버렸다. 덕분에 둘도 없는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남들보다 느렸고, 달랐고,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난 이상함에 남들과 같은 척 거짓 응답을 보이곤 했다. 분명 다르다고 느꼈던 어릴 적 감정들은 지금과 다르게 긍정적이고 특별했었는데. 당연함으로 포장된 의미에 떠밀려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커녕 도태되지 않을까 멈칫댔다. 그들은 같은 의미에 속하고 싶은지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았고, 이성을 차릴 수 없게, 생존법이 발동되도록 가짜 정답만 끝없이 주입하였다.
칭찬을 좋아해서 칭찬받기 위한 사람으로 성장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게 고작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발악이었다니! 능력이 많은 아이는 그만큼 결핍이 많았음을 증명한다. 대외적인 결과물을 위한 꾸준한 발걸음에 혹여 부정적인 반응이라도 보일까 걱정을 일삼았지만, 언제나 섬뜩한 건 무반응이었다. 도리어 긴장을 지나 자잘한 칭찬이라도 돌아오면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표정 관리를 못 할 때도 비일비재했다. 입꼬리야 올라가지 마. 올라가지 마. 올라가지 말라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칭찬은 ‘수민이는 착하니까.’였다. 맞다. 착한 나니까 참아야 한다. 그것은 칭찬을 듣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사회적 기준에 얌전히 어우러져 그들이 말하는 착함만 골라서 따르면 되니까. 그렇게 점점 착하기 위한 사람이 되었다.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기준인 만큼, 잘 지내다가도 타의에 의해 커다란 의심이 생기기도 했다. 세상에는 끊임없는 유혹과 장애물로 가득했고, 주변에는 다양한 환경으로부터 만들어진 가지각색의 인물이 존재했다. 착함이라는 건 마치 가고자 하는 길이 확고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자연재해 속 비포장도로와 같았달까.
그윽한 청국장 냄새가 가득했던 고동빛의 2층 주택. 중학생 시절 도우네 집은 학원이랑 가깝다는 이유로 방과 후에 영훈을 비롯한 친구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고는 했다. 내가 친구들보다 늦게 도착한 날이었다. 뻔한 이야기에 딱히 펀한 일도 아니다. 현관에 들어서니 ‘오늘도 청국장이구나.’ 아니 좌측면에 자리한 빈방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컴퓨터 화면에는 야한 동영상이 흘렀다. 보자마자 나는 계단 따라 도망쳤다. 얘네는 모른다. 그게 순발력이 만들어 낸 쇼였다는 걸. 여전히 애들은 무서워서 도망간 줄 안다. 구수한 향기 때문이면 모를까. 놀래지 않으면 애들이 무안할까 싶기도 했고, 어쨌든 19금이니까. 우리는 어리니까 나쁜 거 맞잖아. 참아야지. 그런 마음이었다. 이날도 최선을 다해 호기심 따위 억눌렀다. 계속해서 억눌렀다. 그게 최선까지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게 더 나쁠까. 집에 부모님 없는 날 친구들과 술 마시기. 아니면 본능과 호기심을 어떻게든 억압해 버리기. 수학 전문 학원에서 만난 친구 지우는 학원에 갈 때마다 문방구 뒤에 숨어서 학교 선배들과 담배를 피웠다. 중학교 1학년이 담배는 어디서 구하는 건지. 다행히 나는 아빠의 흡연으로 담배 냄새를 곁에 두기도 싫었고, “너도 펴볼래?” 같은 유혹에도 흔들릴 리가 없었다. 그래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똘마니가 망보는 것처럼 보였으려나. 차라리 이때처럼 유혹에 대한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면 어떠한 문제도 없었을 거다. 술 마시던 날 끝까지 사이다만 마시고, 안주로 욕도 배불리 먹었던 내가 택하길 원했던 게 만일 다른 가치였다면 어땠을까. 담배를 피워야 했고, 동영상을 봐야 했고, 술 마실 걸 그랬다는 말은 아니다. 정해진 규칙을 어기는 건 모름지기 잘못된 것이고,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으니 감히 어길 리도 없었다. 굳이 자극적인 예시를 든 건, 도의적 문제도 없이 어디에도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자기감정에 충실한 거였다면 나쁜 게 맞을지 의문이라는 거다.
착하다는 건 뭘까. 학습 받은 원칙을 모조리 지키려 애썼음에도 세상은 나를 부정했다. 착하기 위한 발악이 그저 이상한 애로 비추어질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게 서러웠다. 혼자 있을 때조차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듯이 감시받는 기분이었다. 지속되는 불안감에 조이고 조이다 결국 닳아버린 못처럼 억압의 연속은 욕구와 감정의 상실로 남았고, 익숙해진 억압은 자연스러움이 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영화에는 남들에게 당연한 것이, 보통이라 부르는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짓말쟁이라도 되어야만 살 수 있었고, 자기 검열이라는 벽에 부딪혀 정신은 흩어졌다. 거짓말은 ‘착한 아이’ 범주에서 벗어나는 명백한 일탈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이상하게 바라보는 ‘왜?’라는 말이, 혼자만 다르다는 고독이 더 괴로워서 자책을 되뇌며 부정을 멈추었다. 동의에는 묻지를 않는데, 반대에는 끊임없이 이유가 붙으니까. 약일지 악일지. 그게 자기감정을 죽이는 자해의 일종일 줄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내가 착하지 않은 사람일까 봐 두렵다. 숨기고 싶은 게 많아질수록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날들은 늘어가고, 드러내기 불편해진 마음은 그림자 한편에 몰래 쌓아간다. 시시때때로 몰아치는 평가를 넘어 스스로까지도 삼엄한 잣대를 만들어 억압은 이어졌고, 스스로 통제하는 규칙들 사이에서 평범함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당연함이란 본디 자연스러운 건데, 우리는 인위적인 익숙함을 당연함이라고 부른다. 혹여 자연스러움을 논하면 어떻게 그러냐며 원래라는 단어로 가두어버린다. 몸무게만큼 축 늘어져 이완되어본 게 언제일까. 자연에 저항하여 온 부자연스러움이 편안하다며 또다시 재단한다. 섭리를 따를지 말지는 철저한 자유라 한들, 과연 그게 최선일까. 참음의 연속은 감정의 방향을 알 수 없게 하였고, 틀림에 대한 공포로 사용법을 잃은 감정은 얼어붙었다. 그래서 힘들었다.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어서. 마음에 통로를 무언가가 막아서듯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서 과거에 머물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던 게 꿈속으로 달아나 자유라는 이상을 그리는 것. 경외한 하늘의 반짝거림들에게 소원 비는 것뿐이었다.
이미 배우로 살아왔을지 모른다. 미움받아 마땅하지 않다는 명분을 채우기 위해 자신까지 속이면서 삶 자체가 착함을 연기하는 듯했다. 단단한 사람은 껍질로 감싸느라고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유연한 교류와 갈등을 맞부딪히며 자신을 확인하고, 확신을 키워간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깨달아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나로서 존재했던 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취향이 무어냐는 질문에도 사소한 답 하나 꺼내지 못하고, 그럴싸하게 학습된 답을 빌려오는 나다.
“너는 뭘 좋아해?”
“갑자기?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고… 영화도 좋고…”
“어떤 사람? 어떤 영화? 운동 같은 건 안 해?”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확신 없이 얼버무린 대답에 혹여 다음 물음이라도 이어지면 ‘왜 그런 것까지 묻지?’ 궁금해하는 그를 탓해 뻔뻔하고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상대를 가해자 위치에 놓아 탓해야 할 타당성을 부여한달까.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건지. 유일함을 물으면서도 정답이 존재하는 묘한 익숙함에 정형적인 답을 준비하게 되는 건지. ‘이거지-’ ‘이게 맞네.’ 애초에 모두가 정답인 서술란에 학습된 가짜를 끄적인다. 그렇게 고립되어버린 아이는 언제쯤 땅굴 밖으로 피어날까. 그 밖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기다리기만 했지? 나도 움직일 줄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