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나는 착하니까
‘짠돌이’ 언제부턴가 그들이 정해준 내 캐릭터다. 고향에 내려가면 부모님께서는 때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수민이는 옛날부터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그런 욕심이 없어서 고마웠어. 다른 집 애들은 사고 싶은 걸 말하면 친구들은 다 있다고 하니 안 사줄 수도 없고, 부담될 때가 있다던데.”
정말 부모님 말씀대로 나는 욕심이 없었을까. 내가 본격적으로 돈을 아낀 건 중학생 때 소셜커머스에 대해 알게 됐을 때였다. 친구는 여기서 물건을 사면 다른 곳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알려주었고, 그때부터 선물할 돈을 모으기 위해 이곳을 맴돌았다. 그 덕에 친구들이 입는 메이커 제품이 내 몸을 감쌀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사주려고 해도 “아니. 괜찮아.” 내 선택은 그냥 N 로고가 박힌 13,800원짜리 신발과 솜으로 된 패딩이었다.
첫째였음에도 물건 하나 물려줄 일이 없었고, 오히려 동생의 물건을 함께 사용하고는 했다. 부족함 없는 사정에 집안 사업도 꾸준히 발전하였고, 어떤 면에서든 부모님이 투자를 망설인 적도 없었으나 동생의 씀씀이가 커질수록 나의 씀씀이는 반비례했다. 아니 필요 이상으로 마음대로 판단하여 줄여갔다. 생활반경이 마포구였음에도 반대편으로 넘어와서 동생이랑 한동안 지냈던 것도 그 영향이었다. 어쩌면 대리 충족 욕구가 없다는 건 이미 충만한 가정에서 자라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지만, 그 이유로 부모님이 고마워하실 때면 뿌듯하면서도 내심 씁쓸하달까. 가져봐야 더 큰 욕심도 생기는 건데, 내 의지로는 어떤 것도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성인이 되면서 해당 습관은 더 큰 영향으로 나를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 힘이 필요했던 스무 살의 타지 생활. 불필요한 지출을 막기 위한 발버둥이 시작됐다. 불필요함의 기준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달 월 50만 원이 증발하는 자취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삼촌 집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이없는 오해로 떠났다. 와중에 돈을 아끼기 위해 몸보다 몇 배는 커다란 김치냉장고 상자에 조촐한 짐을 짊어지고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괜히 포기했다.’ ‘그렇게 할걸.’ 그때 떠오른 이전 선택들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새로운 자책과 후회를 낳았다. 타지에는 갈 곳도 없었다. 동아리방에 잠깐, 고시원에 잠깐, 선배 집에 잠깐. 곳곳을 쉼 없이 떠돌았고, 끼니를 굶는 경우도 꽤 있었다. 아니었으면 남들보다 느린 성장기에 키가 더 컸을지도! 아이러니하게 혼자 남겨진 공기는 또 싫어서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참석하였고, 그게 곧 식사였다. 부모님을 위한 건 타지에서도 잘 먹고 잘사는 거였을 텐데. 원칙이 남긴 억압은 오만가지 생각을 일으켰고, 금세 구속이 되어 무조건 참는 게 착한 거라는 오만을 일으켜 평생을 참으면서 사는 사람이 되었다.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전부 그랬다. 보고 싶은 영화는 훈장을 받을 만큼 헌혈해야만 봤고, 참다못해 물건을 살 때는 보급형이나 중고였으며, 절약하느라 제대로 된 관계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기본 욕구 중 철저히 생존 욕구에만 머물러 꿈으로 가는 상위 단계는커녕 소속과 애정의 욕구까지도 가지 못했다. 그러니 그 흔한 연애도 하고 싶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을 내려놓은 채 절약이라는 가치에만 매달렸다. 뭐, 과제 하는 학생이, 그것도 영상을 제작하겠다면서 노트북도 가져 본 적이 없고, 혼자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편의점에 간 적도, 막차가 끊겼을 때까지 택시 한 번 타본 적 없이 모든 걸 감내했다면 말 다 했지.
오늘도 변명한다. 짠돌이고 싶었던 적이 없다고. 그리고 해냈다. 세상의 기준에 알맞게 혼자서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힘듦 따위 아무도 모르게 숨길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무뎌짐이라는 가면은 두꺼워갔고, 그 안에 고인 눈물은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까불고, 솔직하고, 매사 걱정 없이 해맑은. 사람들은 내가 열정적이고 행복한 줄만 안다. 그런 말을 듣다 보면 괜찮다고 착각하면서 성장은커녕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수한 감각 체계만을 키워갔다. 내면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나를 받아들일 여유가 필요했으니까. 나의 능력은 생존의 발악이었고, 무인도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자아가 올바르게 형성된 사람은 자기 욕구와 감정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건 자연스러움이니까. 그들의 기대와 칭찬에 목메던 착한 아이는 겉모습만 어른이 되었다. 외롭고, 억울하고, 괴로워하면서도 모순적인 자신을 책하기에 몰두했다. 고작 몇 푼 종이 쪼가리에 행복과 웃음, 그에 돌아오지 않을 나이까지 포기하고 망설이면서 자신을 그것만도 못한 값으로 측정하였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자신조차 알지도, 믿지도 못하고, 아끼기만 하다가 유효기간이 훌쩍 지나버리기에 십상이었다. 그게 사랑법인 줄 알았던 아이의 내면에는 허상 속 가짜 자아만이 자리했다.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해.’
‘아끼는 게 마음이 편해.’
‘괜찮아. 나는 착하니까.’
착한 사람이 곧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착한 사람이 매력 없는 이유는 자기가 없기 때문이었고, 정작 자신에게는 착하지도 않았다. 관찰자를 좇아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묶여 자신을 겨우 변론하기에 바빴다. 우리는 관찰로써 존재한다지만, 관찰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닌데. 고작 이런 내가 되겠다고 지난날들을 버텨온 걸까. 와중에 남 줄 선물은 좋은 것만 찾는 모습. 남들에게 팔아버린 시간. 그것이 나의 바람인 양 연명해왔다. 그런데도 떨떠름한 반응이 돌아올 때면 버텨온 모든 계절을 부정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기에는 사랑받기 위해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했던 선택들, 즉 생존법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했다.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무작정 뛰어놀아 보고, 마음속 말도 솔직하게 뱉어보고, 사고픈 것도 과감히 구매해 봐야 했다. 억압했던 순간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찰나에 맞부딪히며 이전 감정을 덮어줄 새로운 감정을 마주해야 했다. 해당 방어기제가 필요 없었다는 진실을 몸소 느끼면서 지난 계절의 자신을 나의 품으로 직접 안아주어야 했다. 나를 해치는 건 실패가 아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게 선택 권한마저 빼앗아 경험을 억압하는 거였다. 그와 부딪혔을 때는 그동안 감정을 어떤 태도로 마주해왔는지, 무엇보다 자신이 우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별거 없었구나. 남들처럼 마음껏 즐겨도 되는 거였구나. 끝없는 자기 검열에 핑곗거리를 찾아 합리화하기 바빴던 나는 실패 경험치가 없어 사전적인 환상에 갇혀있었다. 욕심도, 질투도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럴 자격조차 빼앗은 거였다. 단지 그들은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일 뿐인데. 나와 타인의 욕구가 구별되어 하나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날에는 그들이 미워하든, 좋아하든, 돌아올 어떤 평가도 알 바가 아니었다. 실패라는 이름의 치열한 경험을 사랑했고,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것이 중요했다. 자기감정의 이름은 누가 뭐래도 스스로 정하는 거였으니.
“나는 내 영화가 재미있어. 그거면 충분해.”
오랜 원칙과 평가의 기억도 내려두었다. 물론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습관에는 수없는 연습이 필요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것에는 부모님이 거쳐온 계절과 감정들까지 짙게 묻어있었음을 탐지해냈고, 그런 당신을 안아주고 싶었다. 우리는 빼닮아있었고, 의미로 현상이 변형된다는 건 관성을 추진력으로 당겨와 반작용의 시간을 앞당길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 이후에야 깊은 곳에 갇혀있던 어린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밖으로 나와 해방을 맞이했다. 나도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믿음으로. 무엇보다 자신을 존중하면서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 한 명. 나뿐이다. 어떠한 상황에도 주인공은 바뀌지 않는데, 다른 등장인물이 중심인 영화라면 그게 엉망인 거 아닐까. 그걸 깨달은 순간 처음으로 나는 살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