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야르' 초연 잔혹사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 (2)

by 도자기

1962년 7월 20일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3번>을 완성합니다. 총 다섯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의 시 다섯 개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그중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악장 '바비 야르'는 1941년 9월, 키예프 외곽 바비 야르 협곡에서 발생한 유대인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Babi_Jar_ravijn.jpg 바비 야르 (사진 : 위키)


1961년 9월 <문학 신문>에 발표된 옙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는 반유대주의가 존재하던 러시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곧이어 쇼스타코비치는 이 시를 토대로 자신의 열세 번째 교향곡을 완성합니다. 먼저 쓰인 1악장 '바비 야르'를 제외한 2~5악장은 쇼스타코비치가 입원한 병원에서 완성됩니다. 곡이 준비된 이제, 남은 것은 초연입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의 초연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소련 방문, 마네슈 전시회 사건,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구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초연 등 수많은 사건이 일어난 1962년 소련 문화예술계. 그 한가운데에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있었습니다.

MI0001088539.jpg 도이치 그라모폰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앨범




<교향곡 13번> 작곡을 완성하고 퇴원한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키예프로 향합니다. <교향곡 13번> 초연에 필요한 베이스 독창자를 구하기 위해서였지요. 쇼스타코비치가 염두에 둔 사람은 보리스 그미랴였습니다. 보리스 그미랴에게 <교향곡 13번>의 악보를 보여준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레닌그라드로 향합니다. 바로 지휘자 므라빈스키를 만나기 위해서였지요. 므라빈스키는 1937년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초연 지휘를 맡은 이후 쇼스타코비치를 가장 잘 해석하는 지휘자로, 그의 많은 곡 초연을 도맡아 왔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번에도 당연히 므라빈스키에게 새 교향곡 초연을 부탁할 생각이었지요.

162995fc6bdd5044_1024.jpg 므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 (1961)


그러나 얼마 뒤, 쇼스타코비치에 날아온 것은 두 번의 거절이었습니다. 보리스 그미랴와 므라빈스키 모두 <교향곡 13번>의 초연을 거부한 것이었지요. 이는 쇼스타코비치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므라빈스키의 거절은 특별히 더 그러했지요. 어쨌든 곡은 초연해야 하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다른 지휘자를 찾았습니다.

maxresdefault-3.jpg 쇼스타코비치와 키릴 콘드라신

쇼스타코비치는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지휘자 키릴 콘드라신에게 <교향곡 13번>의 초연을 부탁하고, 콘드라신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중요한 베이스 독창자는 볼쇼이 극장의 빅토르 네치파일로로 정했습니다. 동시에 비탈리 그로마츠키를 베이스 독창자로 더블 캐스팅하지요. <교향곡 13번>의 초연은 1962년 12월 18일로 모스크바에서 예정되었습니다.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의 초연이 얼마 남지 않은 1962년 12월 1일, 공산당 제1서기이자 수상인 니키타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마네슈에서 열린 "모스크바 예술 30년" 전시회에 방문합니다. 마네슈에 전시된 에른스트 네이즈베스트니, 보리스 주토프스키 등의 추상예술 작품을 본 흐루쇼프는 이들에 대해 '멍청이, 기생충, 구역질 나는 놈들'이라고 말하며 분노를 터뜨립니다.

1065px-Moscow_Manege_-_2.jpg 1962년 "모스크바 예술 30년" 전시가 열린 모스크바 마네슈


이 사건의 여파는 곧 문화 예술 전반으로 번집니다. 12월 17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는 400여 명의 문학, 음악, 연극, 영화계 지식인이 소집된 회의가 열립니다. 새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 위원회'를 맡게 된 레오니드 일리체프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공존은 불가하다며, 예술에 있어서 당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는 화가, 조각가, 문학, 영화계에서 만연한 형식주의 경향을 비난합니다.

content_hru.jpg 마네슈 전시장에서 흐루쇼프 (1962)

흐루쇼프 역시 다음과 같이 발언합니다.

"이것이 조각인가? 나는 이미 그들이 남색가는 아닌지 물었다. 그러나 사람이 10살에는 남색가일 수 있다고 하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몇 살인가?...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그의 음악은 재즈 그 이상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나에게 복통을 유발한다..(중략).. 네이즈베스트니, 주토프스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만약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를 떠나라고 해라."


이 회의에는 쇼스타코비치와 옙투셴코도 참석합니다. 특히 회의에서 벌어진 옙투셴코와 흐루쇼프의 날 선 대화는 유명합니다.

옙투셴코 : "우리는 추상예술에 대해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문제시되는 예술가들을 알고, 그들의 작품을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몇몇 형식주의적인 경향은 때가 되면 마침내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흐루쇼프 : "꼽추의 등은 무덤만이 필 수 있다."
옙투셴코 : "니키타 세르게예비치(흐루쇼프), 우리는 그런 시대에서 진보하였다. 진정으로, 이제는 다른 길이 있다."




한편 바로 다음 날인 1962년 12월 18일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 초연이 예정된 날입니다. 그러나 소련 문화 이데올로기의 시계는 다시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고, '바비 야르' 역시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은 무사히 초연될 수 있었을까요?


e7e84d27877144f896ea238adebe7d6b.jpg 1962년 12월 18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초연이 예정된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


그 답은 초연 당일이 되어도 불투명했습니다. 초연 당일 드레스 리허설에 베이스 독창자 빅토르 네치파일로가 불참한 것입니다. 그가 불참한 이유는 두 가지 버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연을 지휘한 키릴 콘드라신은 드레스 리허설이 시작되기 직전 네치파일로가 아파서 공연할 수 없다고 전화했다고 말하고,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넵스카야는 그가 그날 볼쇼이 극장의 예정된 공연에서 노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네치파일로의 불참은 그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모두가 알 수 있었지요.


예정된 독창자가 불참하자 이미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 교수, 당 관계자들로 꽉 찬 홀에는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했습니다. 다행히 함께 곡을 익힌 베이스 비탈리 그로마츠키가 대신 합류해 우여곡절 끝에 리허설이 진행되었지요.


그리고 그날 저녁,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는 마침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초연됩니다. 독창자는 비탈리 그로마츠키, 합창은 러시아 공화국 합창단과 그네신 음악원 합창단, 키릴 콘드라신이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였지요.


Shost_1.jpg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초연일. (왼쪽부터) 쇼스타코비치, 키릴 콘드라신, 예브게니 옙투셴코


초연에 참석한 음악학자 보리스 슈바르츠는 자신의 책에서 이 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음악원 앞에는 경찰들이 있었고, 공연장 안은 인파로 꽉 찼다고 합니다. 2부에 예정된 <교향곡 13번> 연주를 기다리는 인터미션은 마치 영원과도 같았지요. <교향곡 13번>의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브라-보 쇼스-타-코-비치", "브라-보 옙-투-셴-코"라는 리드미컬한 박수가 말이지요.


마침내 이루어진 초연 이후에도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는 몇 가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1963년 1월, 옙투셴코는 시 '바비 야르'의 일부를 유대인 이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희생을 담은 내용으로 수정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옙투셴코의 갑작스러운 수정에 당황하며 <교향곡 13번> 원고에는 이 수정된 가사를 넣지 않지만, 이후 공연은 수정된 가사로 이루어집니다. 옙투셴코는 르 몽드 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바비 야르'를 수정하라는 압박을 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비 야르에서 희생된 건 유대인만이 아니다."는 말은 시 '바비 야르'의 발표 직후부터 계속되어 온 비난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몇 년 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대중들의 수많은 관심을 받았던 두 작품을 꼽습니다. 바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교향곡 13번>이지요. 이 두 작품은 쇼스타코비치에게 크나큰 곡절을 가져다주었으며, 지금까지도 쇼스타코비치의 대표 작품으로 꼽힙니다.


한편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초연된 1962년 12월 18일로부터 며칠 뒤인, 12월 26일에는 25년 넘게 소련에서 공연되지 못하던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비공개 초연됩니다.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의 공식 초연은 1963년 1월 8일)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을 참고해주세요.

https://brunch.co.kr/@dozagi925/4



<교향곡 13번>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정말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교향곡 13번>을 완성한 7월 20일을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생일'이라고 말했던 <교향곡 1번>의 초연일과 함께 이후에도 매년 기념합니다. 어느 해 이 기념할만한 날을 함께 보낸 친구 이작 글리크만은 쇼스타코비치의 기념식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들은 13개의 촛불을 켜놓고 앞으로 공연장에서 <교향곡 13번>의 밝은 미래를 위해 건배했다고 합니다.


birthday-1114056_640.jpg




옙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시작합니다.

바비 야르 위에는 그 어떤 기념비도 없다.
가파른 협곡은 마치 묘비와도 같다.


1961년 옙투셴코가 이 시를 썼을 당시 바비 야르에는 말 그대로 그 어떤 기념비도 없었습니다.

물론 옙투셴코 이전에도 바비 야르에 관해 쓴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바비 야르 학살 사건이 발생한 1941년, 사건을 목격한 작가 류드밀라 티토바는 바비 야르에 관한 시를 썼다고 합니다. 그 이후 1943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시인 미콜라 바잔이, 1944년에는 유명 작가 일리야 에렌부르크가, 1946년에는 레프 오제로프가 <바비 야르>라는 시를 발표합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바비 야르 학살 사건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침묵이 깨지는 것은 옙투셴코의 시가 나온 이후.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초연되자 더 이상 아무도 바비 야르에 대해 침묵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옙투셴코의 시와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알고 있는 모두가 1941년 9월 29일, 바비 야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m1000x1000.jpeg 바비 야르 기념비를 담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앨범


현재 바비 야르에는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있습니다. 이 기념비를 직접 가서 볼 수는 없지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를 들을 때마다 음악은 과연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나아가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참고 자료

- Elizabeth Wilson, Shotakovich - A Life Remember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 Laurel E. Fay, Shostakovich : A Life,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 Boris Schwarz, Music and Musical Life in Soviet Russia, Indiana University Press, Enlarged Edition, 1983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비 야르 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