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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자기 Jul 27. 2019

'바비 야르' 초연 잔혹사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 (2)

1962년 7월 20일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3번>을 완성합니다. 총 다섯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의 시 다섯 개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그중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악장 '바비 야르'는 1941년 9월, 키예프 외곽 바비 야르 협곡에서 발생한 유대인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비 야르 (사진 : 위키)


1961년 9월 <문학 신문>에 발표된 옙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는 반유대주의가 존재하던 러시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곧이어 쇼스타코비치는 이 시를 토대로 자신의 열세 번째 교향곡을 완성합니다. 먼저 쓰인 1악장 '바비 야르'를 제외한 2~5악장은 쇼스타코비치가 입원한 병원에서 완성됩니다. 곡이 준비된 이제, 남은 것은 초연입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의 초연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소련 방문, 마네슈 전시회 사건,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구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초연 등 수많은 사건이 일어난 1962년 소련 문화예술계. 그 한가운데에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있었습니다.

도이치 그라모폰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앨범




<교향곡 13번> 작곡을 완성하고 퇴원한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키예프로 향합니다. <교향곡 13번> 초연에 필요한 베이스 독창자를 구하기 위해서였지요. 쇼스타코비치가 염두에 둔 사람은 보리스 그미랴였습니다. 보리스 그미랴에게 <교향곡 13번>의 악보를 보여준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레닌그라드로 향합니다. 바로 지휘자 므라빈스키를 만나기 위해서였지요. 므라빈스키는 1937년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초연 지휘를 맡은 이후 쇼스타코비치를 가장 잘 해석하는 지휘자로, 그의 많은 곡 초연을 도맡아 왔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번에도 당연히 므라빈스키에게 새 교향곡 초연을 부탁할 생각이었지요.

므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 (1961)


그러나 얼마 뒤, 쇼스타코비치에 날아온 것은 두 번의 거절이었습니다. 보리스 그미랴와 므라빈스키 모두 <교향곡 13번>의 초연을 거부한 것이었지요. 이는 쇼스타코비치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므라빈스키의 거절은 특별히 더 그러했지요. 어쨌든 곡은 초연해야 하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다른 지휘자를 찾았습니다. 

쇼스타코비치와 키릴 콘드라신

쇼스타코비치는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지휘자 키릴 콘드라신에게 <교향곡 13번>의 초연을 부탁하고, 콘드라신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중요한 베이스 독창자는 볼쇼이 극장의 빅토르 네치파일로로 정했습니다. 동시에 비탈리 그로마츠키를 베이스 독창자로 더블 캐스팅하지요. <교향곡 13번>의 초연은 1962년 12월 18일로 모스크바에서 예정되었습니다.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의 초연이 얼마 남지 않은 1962년 12월 1일, 공산당 제1서기이자 수상인 니키타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마네슈에서 열린 "모스크바 예술 30년" 전시회에 방문합니다. 마네슈에 전시된 에른스트 네이즈베스트니, 보리스 주토프스키 등의 추상예술 작품을 본 흐루쇼프는 이들에 대해 '멍청이, 기생충, 구역질 나는 놈들'이라고 말하며 분노를 터뜨립니다. 

1962년 "모스크바 예술 30년" 전시가 열린 모스크바 마네슈


이 사건의 여파는 곧 문화 예술 전반으로 번집니다. 12월 17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는 400여 명의 문학, 음악, 연극, 영화계 지식인이 소집된 회의가 열립니다. 새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 위원회'를 맡게 된 레오니드 일리체프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공존은 불가하다며,  예술에 있어서 당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는 화가, 조각가, 문학, 영화계에서 만연한 형식주의 경향을 비난합니다.

마네슈 전시장에서 흐루쇼프 (1962)

흐루쇼프 역시 다음과 같이 발언합니다.

"이것이 조각인가? 나는 이미 그들이 남색가는 아닌지 물었다. 그러나 사람이 10살에는 남색가일 수 있다고 하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몇 살인가?...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그의 음악은 재즈 그 이상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나에게 복통을 유발한다..(중략).. 네이즈베스트니,  주토프스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만약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를 떠나라고 해라."


이 회의에는 쇼스타코비치와 옙투셴코도 참석합니다. 특히 회의에서 벌어진 옙투셴코와 흐루쇼프의 날 선 대화는 유명합니다.

옙투셴코 :  "우리는 추상예술에 대해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문제시되는 예술가들을 알고, 그들의 작품을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몇몇 형식주의적인 경향은 때가 되면 마침내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흐루쇼프 : "꼽추의 등은 무덤만이 필 수 있다."
옙투셴코 : "니키타 세르게예비치(흐루쇼프), 우리는 그런 시대에서 진보하였다. 진정으로, 이제는 다른 길이 있다."




한편 바로 다음 날인 1962년 12월 18일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 초연이 예정된 날입니다. 그러나 소련 문화 이데올로기의 시계는 다시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고, '바비 야르' 역시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은 무사히 초연될 수 있었을까요?


1962년 12월 18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초연이 예정된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


그 답은 초연 당일이 되어도 불투명했습니다. 초연 당일 드레스 리허설에 베이스 독창자 빅토르 네치파일로가 불참한 것입니다. 그가 불참한 이유는 두 가지 버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연을 지휘한 키릴 콘드라신은 드레스 리허설이 시작되기 직전 네치파일로가 아파서 공연할 수 없다고 전화했다고 말하고,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넵스카야는 그가 그날 볼쇼이 극장의 예정된 공연에서 노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네치파일로의 불참은 그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모두가 알 수 있었지요.


예정된 독창자가 불참하자 이미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 교수, 당 관계자들로 꽉 찬 홀에는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했습니다. 다행히 함께 곡을 익힌 베이스 비탈리 그로마츠키가 대신 합류해 우여곡절 끝에 리허설이 진행되었지요.


그리고 그날 저녁,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는 마침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초연됩니다. 독창자는 비탈리 그로마츠키, 합창은 러시아 공화국 합창단과 그네신 음악원 합창단, 키릴 콘드라신이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였지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초연일. (왼쪽부터) 쇼스타코비치, 키릴 콘드라신, 예브게니 옙투셴코


초연에 참석한 음악학자 보리스 슈바르츠는 자신의 책에서 이 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음악원 앞에는 경찰들이 있었고, 공연장 안은 인파로 꽉 찼다고 합니다. 2부에 예정된 <교향곡 13번> 연주를 기다리는 인터미션은 마치 영원과도 같았지요. <교향곡 13번>의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브라-보 쇼스-타-코-비치", "브라-보 옙-투-셴-코"라는 리드미컬한 박수가 말이지요. 


마침내 이루어진 초연 이후에도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는 몇 가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1963년 1월, 옙투셴코는 시 '바비 야르'의 일부를 유대인 이외에도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희생을 담은 내용으로 수정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옙투셴코의 갑작스러운 수정에 당황하며 <교향곡 13번> 원고에는 이 수정된 가사를 넣지 않지만, 이후 공연은 수정된 가사로 이루어집니다. 옙투셴코는 르 몽드 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바비 야르'를 수정하라는 압박을 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비 야르에서 희생된 건 유대인만이 아니다."는 말은 시 '바비 야르'의 발표 직후부터 계속되어 온 비난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몇 년 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대중들의 수많은 관심을 받았던 두 작품을 꼽습니다. 바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교향곡 13번>이지요. 이 두 작품은 쇼스타코비치에게 크나큰 곡절을 가져다주었으며, 지금까지도 쇼스타코비치의 대표 작품으로 꼽힙니다. 


한편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초연된 1962년 12월 18일로부터 며칠 뒤인, 12월 26일에는 25년 넘게 소련에서 공연되지 못하던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비공개 초연됩니다.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의 공식 초연은 1963년 1월 8일)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을 참고해주세요.

https://brunch.co.kr/@dozagi925/4



<교향곡 13번>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정말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교향곡 13번>을 완성한 7월 20일을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생일'이라고 말했던 <교향곡 1번>의 초연일과 함께 이후에도 매년 기념합니다. 어느 해 이 기념할만한 날을 함께 보낸 친구 이작 글리크만은 쇼스타코비치의 기념식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들은 13개의 촛불을 켜놓고 앞으로 공연장에서 <교향곡 13번>의 밝은 미래를 위해 건배했다고 합니다.





옙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시작합니다.

 바비 야르 위에는 그 어떤 기념비도 없다.
가파른 협곡은 마치 묘비와도 같다.


1961년 옙투셴코가 이 시를 썼을 당시 바비 야르에는 말 그대로 그 어떤 기념비도 없었습니다. 

물론 옙투셴코 이전에도 바비 야르에 관해 쓴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바비 야르 학살 사건이 발생한 1941년, 사건을 목격한 작가 류드밀라 티토바는 바비 야르에 관한 시를 썼다고 합니다. 그 이후 1943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시인 미콜라 바잔이, 1944년에는 유명 작가 일리야 에렌부르크가, 1946년에는 레프 오제로프가 <바비 야르>라는 시를 발표합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바비 야르 학살 사건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침묵이 깨지는 것은 옙투셴코의 시가 나온 이후.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이 초연되자 더 이상 아무도 바비 야르에 대해 침묵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옙투셴코의 시와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알고 있는 모두가 1941년 9월 29일, 바비 야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비 야르 기념비를 담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앨범


현재 바비 야르에는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있습니다. 이 기념비를 직접 가서 볼 수는 없지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를 들을 때마다 음악은 과연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나아가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참고 자료

- Elizabeth Wilson, Shotakovich - A Life Remember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 Laurel E. Fay, Shostakovich : A Life,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 Boris Schwarz, Music and Musical Life in Soviet Russia, Indiana University Press, Enlarged Edition,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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