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가 할 수 있던 건 걷기 밖에 없어서
KTX를 타고 강릉에 다녀왔다. 바다를 보는 건 1년 반, 강릉에 가는 건 3년 만이었다.
오며 가며 기차 안에서 읽을 책으로 가방 안에 두 권을 넣어 갔다. 그중 한 권은 <책의 말들>(김겨울 저)이었다. 며칠 전 서점에서 데려온 책이라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정돈되고 차분한 글과 책, 책, 책 속의 문장들이 어우러져 책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한 편이 내 마음을 끌었다.
"어떤 날에는 제주도 해변의 카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시켜 두고 책과 바다를 밥과 반찬처럼 바라보았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길가에 단정히 놓인 테이블 너머로 보이던 푸른 수평선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명절을 피해 도망친 여행에서 나는 실컷 앉고 실컷 읽고 실컷 걸었다. 캐리어도 없이 들고 나온 백팩이 대책 없이 무거웠다." - 김겨울, <책의 말들> 71쪽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장담하지 못한 채 가만히 카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늘 카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늘 책을 들고 가만히 카페에 앉아 있었다. 무엇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몰라 앉아 있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읽고 쓰는 동안 무수한 시간이 멍청한 나를 통과해 갔다. 그래서 앉아 있는 것도 흘러가는 것이구나, 알게 됐다." - 김겨울, <책의 말들> 71쪽
이 글이 유독 내 마음을 끈 이유는 이날 가고 있던 강릉이 내게 그런 곳이라서 일 것이다.
처음 홀로 강릉에 간 건 대학교에 다니던 어느 해 추석이었다. 명절을 맞아 강릉 경포호 주변에서도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호수 옆 정자에서는 한복을 입은 국악인들이 연주하고 있었고, 호수를 둘러싼 산책로에서는 가족들이 삼삼오오 걷거나 자전거를 탔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있었고, 호수 주변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혼자였다.
그날 밤, 내가 왜 강릉에 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고, 혹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호수 주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행사를 구경했고, 명절을 맞아 나들이 나온 사람들을 구경했고, 넓고 넓은 경포호를 구경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변 인파들과 함께 경포호를 따라 걷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금만 걷다가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깜깜한 밤이어서 경포호가 그렇게 넓은지 미처 짐작하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서였을까. 나는 그날 걷고 걷고 또 걸었고, 그렇게 경포호를 한 바퀴 돌았다.
멀쩡한 대낮에야 나는 경포호가 그렇게 넓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시 이 호수를 한 바퀴 빙 걸으라고 하면 난 할 수 있을까? 물론 걸을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날 밤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 걷고 또 걸을 수는 없을 거야.
아마도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걷기 뿐이었을 것이다. 걷고 또 걸으면서 무언가를 잊고 그 자리에 나도 모르던 것들이 채워졌다. 이 사실을 몇 년 뒤 강릉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깨닫게 되었다.
무작정 경포호를 한 바퀴 돈 다음 날에도 나는 강릉을 걷고 또 걸었다. 이번에는 경포해변에서 강문, 송정해변을 거쳐 안목해변까지 가는 길이었다. 네이버 지도로 검색해보니 경포에서 안목해변까지는 5km라고 한다. 처음 이 길을 걸을 때에는 계속 길이 이어질지 의아했다. 경포해변에서 강문해변까지는 평범한 모래사장과 다리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강문에서 안목해변까지 가는 길이 하이라이트인데, 이 길에는 긴 소나무 숲이 있다.
처음 이 솔숲을 걸을 때는 무서웠다. 왜냐하면 몇 년 전 이 숲길에는 거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숲 곳곳에는 군용 시설(타이어로 쌓은 참호 같은 것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길을 걸어도 되는 거 맞아?'라고 의아해하는 한편, 길은 나있으니 계속 걸었다. 그러나 소나무 숲과 참호와 바다가 어우러진 초행길은 걷는 내내 기분이 묘해서 종종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한두 명 나올 때에는 무섭기까지 했다.
이 두려움과 의아함은 익숙한 건물이 나오는 안목해변에 도착해서야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쉽게 볼 수 없었던 소나무 숲과 소나무 사이로 보이던 해변, 그리고 경포해변에서 안목해변까지 꽤 먼길을 걸어왔다는 성취감이 뒤섞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올해 다시 방문한 소나무 숲은 더 이상 초행길이 아니기에 두렵지 않았다. 숲길을 걷는 사람도 이전보다 많아졌고, 송정해변에는 소나무 숲에 숙박시설을 짓는 것을 반대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솔숲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소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모래사장, 그리고 나무에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모습. 마지막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참호까지.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날 나는 17,000보를 걸었다. 여행을 가면 매일 20,000~25,000보 정도 걷는터라 그 정도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평소에 나는 대략 하루 4,000보를 걷는다. 이렇게 길을 떠난 나는 걷고 또 걸으면서 무언가를 흘려보내고 그 빈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채운다. 걷고 있던 순간에는 알지 못했지만 그 시간들이 여기저기 한 무더기씩 쌓여 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면서.
2021. 02. 04.
도자기
<인용 출처>
- 김겨울, <책의 말들>. 유유(2021),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