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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자기 Jan 07. 2022

만화『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제작기 02

세 개의 오렌지의 여정

지난 번 [독립출판 제작기 01]에서는 작곡가 프로코피에프가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오페라로 쓰게 된 계기를 한 편의 논문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까지 이야기했다.

https://brunch.co.kr/@dozagi925/59


[독립출판 제작기] 두 번째 글에서는 바로 그 논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과연 한 편의 논문에서 어떻게 실마리를 찾아 만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지금부터 시작한다.




1. 운명(?)의 논문을 발견하다!

때는 2019년 가을, 한창 언리미티드 에디션 11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진행하던 책 작업을 대략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카페에서 쉬던 중, 습관적으로 RISS(학술연구정보서비스)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종종 RISS에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러시아 음악' 등을 검색해보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최신 논문이 어떤 것이 나와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이런 논문들을 당장은 읽지 않더라도(�) 하나씩 모으는 재미가 있기 때문!


운명의 논문을 발견한 이 날도 습관적으로 RISS에서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관심이 있었지만, 거의 이름만 알고 있던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 떠올랐고, 그렇게 RISS 검색창에 '세 개의 오렌지'를 검색했다. 그리고...


두둥!


검색 결과창에서 처음 보는 논문을 발견했다. 바로 2019년 당시 따끈따끈하게 나온 새로운 논문이었다. 

논문의 제목은 <나보코프 소설 창작의 연극적 기원 : 메이에르홀드와 나보코프의 오렌지>


이 논문은 20세기 초, 러시아 예술계에 유행했던 이탈리아 민중극 형식인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와 러시아의 연출가 메이예르홀트에서 작가 나보코프까지 이어지는 오렌지 모티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논문을 읽기 시작하자 이 오렌지 모티프가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속 오렌지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 오렌지 하나,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시작에는 이탈리아 민중극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가 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3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번성한 대중극이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주된 특징은 이렇다.


(1) 전문극단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배우들은 순회공연을 다니는 전문 직업 배우였다.

(2) 즉흥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에는 무대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플롯, 배경, 인물, 소도구, 인물의 등장과 퇴장, 주요 줄거리의 짧은 묘사)를 담은 '셰나리'가 있다. 그러나 이 셰나리는 고정된 대본과 같은 완결된 작품이 아니며, 세부적인 대사들과 연기는 무대 위 배우에게 달려 있었다. 따라서 그 내용은 장소, 상황, 공연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3) 대중가면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가면극이라는 점이다. 특히 코메디아 델라르테에는 정해진 가면과 복장을 한 정형화된 인물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피에로'도 있다.

참고 문헌. 김찬자, 『코메디아 델라르테』, 연극과 인간, 2005

앙투완 와토, 질(Gilles) -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피에로, 1719


피에로 이외에도 코메디아 델라르테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과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에서도 역시 등장한다.


(좌) 코메디아 델라르테 속 '판탈로네'(우)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에서 같은 이름으로 왕의 곁을 지키는 광대로 나온다.


(좌) 코메디아 델라르테 속 '아를레키노' 혹은 '트루팔디노'(우) 만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에서 공주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광대로 나온다.




3. 오렌지 둘, 카를로 고치와 세 개의 오렌지


코메디아 델라르테가 점점 쇠퇴해가던 18세기, 이탈리아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한다. 그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양식을 전통적인 옛 이야기와 결합한 '연극 동화(fiable teatrali)' 시리즈를 출간하는데, 이 중 첫 권이 바로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다.


카를로 고치의 연극 동화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17세기 이탈리아 작가 잠바티스타 바실레가 이탈리아 민담을 모은 책 『펜타메로네(Il pentamerone)』에 나오는 '세 개의 시트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출처. 김윤하, 『나보코프 소설 창작의 연극적 기원』, 국내박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9, 49


민담 '세 개의 시트론'의 내용은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과 거의 흡사하다. 참고로 '세 개의 시트론'이 실린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책 『펜타메로네』는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

http://aladin.kr/p/KJ20K




4. 오렌지 셋, 메이예르홀트와 세 개의 오렌지

그리고 18세기 이탈리아의 오렌지는 드디어 20세기 초 러시아로 굴러간다!

그 오렌지를 건너 받은 사람은 바로 러시아의 연출가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이다.


메이예르홀트가 활동하던 20세기 초 러시아 예술계에는 코메디아 델라르테 열풍이 불었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 곳곳에서 이탈리아 가면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콘스탄틴 소모프, <할리퀸과 죽음>, 1907
콘스탄틴 소모프, <콜롬비나의 작은 혀>, 1915


당시 보로진스카야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메이예르홀트는 1914년 1월 연극 잡지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출간한다. 그리고 이 잡지의 창간호에는 카를로 고치의 희곡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메이예르홀트가 개작한 디베르티스망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 실린다.

 출처. 김윤하, 『나보코프 소설 창작의 연극적 기원』, 국내박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9, 53

(좌) 잡지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표지, 1915(우) 잡지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창간호에 실린 디베르티스망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일부


그리고 1918년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던 프로코피예프의 손에 있던 것도 바로 이 연극 잡지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창간호였다. 

 출처. 김윤하, 『나보코프 소설 창작의 연극적 기원』, 국내박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9, 55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러시아로 건너온 오렌지가 드디어 프로코피예프의 손에 닿은 것이다!


프로코피예프는 이 잡지에 실린 메이예르홀트 개작의 디베르티스망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직접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리브레토를 쓰고 작곡한다. 그리고 이 오페라는 1921년 시카고에서 초연된다.




오늘은 이렇게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기나긴 여정을 살펴보았다. 

그럼 오늘의 여정을 간단히 정리해볼까?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역사

이탈리아 구전 민담

(17세기) 잠바티스타 바실레 『펜타메로네』 이야기 선집에 '세 개의 시트론'으로 수록.

(18세기) 이탈리아 극작가 카를로 고치의 '연극 동화' 출간. 시리즈 첫 권으로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1914년) 러시아 극작가 메이예르홀트의 보로진스카야 스튜디오에서 잡지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출간. 잡지 창간호에 메이예르홀트가 카를로 고치의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를 개작한 디베르티스망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 실림.

(1918년)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는 메이예르홀트에게서 받은 잡지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창간호를 가지고 미국으로 감.

(1919년)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작곡

(1921년) 시카고 오페라단,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초연



오늘은 이렇게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기나긴 여정을 한 편의 논문을 바탕으로 되짚어 보았다.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에 얽힌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논문을 참고하면 된다.

http://www.riss.kr/link?id=T15301350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글에서는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만화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원작과 달라진 점, 그 이유 등을 이야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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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를 읽고 책이 궁금해지셨다면 많은 구매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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