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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찌 Oct 22. 2023

계시가 있었다

  리지와 ‘묘연’을 맺기 전, 강렬한 계시가 있었다.


  2021년 11월 중순쯤 난 회사 같은 팀 분들과 영월의 한 글램핑장에 갔다. 캠핑 마니아인 팀장님의 장비와 다섯 명의 미식 취향이 고루 담긴 장바구니를 차 두대에 싣고 출발하자 심장은 바운스 바운스 두근댔다. 곧 빌딩 숲이 사라지고 진짜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단전에서부터 생기가 돋아났다.

  글램핑장에 도착해 보니 산 아래 평지에 색색의 캠핑카와 텐트가 크게 빙 둘러져 있었다. 그중 핑크색 캠핑카가 눈에 띄게 예뻤다.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는데 나무 데크 위에 웬 까만 솜뭉치가 있었다. 잠깐. 눈을 깜빡이는데?

  “고양이네요!”

  옆에 있던 팀원분이 말했다. 자세히 보니 노란 두 눈이 꼭 먹물색 빵에 콕콕 박힌 치즈 같았다. 까만 고양이는 자기가 그 캠핑카의 투숙객이라도 되는 듯 당당하게 서서 우리를 쳐다봤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자 더 많은 고양이가 몰려들었다. 어떤 고양이는 투플러스 한우 포장 용기로 곧장 다가왔고(미식가네?), 어떤 고양이는 식탁엔 앞발을 딛곤 쌈무에 코를 킁킁 댔으며(반찬파구나?). 어떤 고양이는 바비큐 그릴의 온기를 쬐면서 식빵을 구웠다(노릇노릇). 이거 다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하이라이트는 고기를 구울 때였다. 연기가 나자 그릴에서 2m 떨어진 길가에 열댓 마리의 고양이가 몰려든 것이다. 고양이들은 그곳이 잘 익은 고기가 던져질 VIP석임을 아는 듯했다. 팀장님이 고기를 한 점씩 던져주실 때마다 고기가 떨어지는 쪽으로 고양이 떼가 몰려들었다. 이쪽으로 우르르, 저쪽으로 우르르. 살다 보니 고양이 떼랑 디너파티를 다해보네.


  그날로부터 4일 후. 강렬했던 고양이 파티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았던 어느 겨울날. 김박이 강력해진 동장군의 기세에 볼이 빨개진 채 집에 오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오후에 대학교 동아리 선배 연락이 왔는데 선배 아파트 근처에 사람 손 탄 고양이가 있대. 엄마 고양이 없이 혼자. 지금 구조하면 임보(임시보호) 가능한지 물어보시는데 어쩌지?”

  김박의 선배는 고양이 세 마리의 집사(이하 호칭은 ‘삼냥이 집사님’)시라 다른 고양이 임보가 어려우셨다. 고양이는 갑작스럽게 다른 고양이와 합사 하면 스트레스를 크게 받기 때문이다. 그레도 체감온도 영하 7도에 육박하는 추위에 혼자 남겨진 어린 고양이를 외면하긴 어려우셨으리라. 한때 레오 집사였던 김박이 떠올라 SOS를 보내신 것 같았다. 삼냥이 집사님은 김박에게 그 고양이 영상도 보내주셨다. 얼굴에 검은색 물감이 깊게 침범한 듯한 무늬를 가진 삼색 고양이였다. 경계하며 뒤를 홱, 홱, 돌아보면서도 다가와 코인사를 한 뒤 간식을 요구하는 폼이 사뭇 당당했다. ‘팬 서비스해 줬는데 쫌 주지?’하는 표정이었으니까.

  “좋아. 임보하자.”

  거의 바로 답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사실 임보가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모르고 한 결정이었다. 그저 그 고양이가 안 춥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벌벌 떨던 고양이가 우리 집에 와서 몸을 녹이면서 노곤하게 잠든 모습을 상상하니 좋았다. 삼냥이 집사님은 김박에게 바로 남편분과 구조를 해보시겠다고 전했다. 그런데 자정이 넘어도 구조 소식은 오지 않았다.

  “고양이가 좋아하던 간식 갖고 다녀보시는데도 고양이가 안 보이신대.”

  구조 2시간째. 시린 기운이 매서워지고 있었다. 더 이상의 구조 활동은 무리였다. 삼냥이 집사님은 다음 날 퇴근 후 다시 구조를 해보시겠다셨다. 고생하셨다는 연락을 남기는 김박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고양이 얼굴이 아른거렸다.

  “추위 피해서 어디 잘 숨어 있겠지?”

  “그래야 할 텐데.”

  얼굴을 알게 되자 그 고양이는 일반명사로서의 고양이를 넘어 우리가 기다리는 ‘바로 그 고양이’라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제 그 고양이가 안전해야만 우리도 안심할 수 있게 된 거다. 영상을 들여다볼수록 그 고양이는 마음을 훅 침범해 왔다. 잔고도 훅 침범해 왔다(!). 임보에 필요한 고양이 용품을 쿠팡 장바구니에 착착 채워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양이용 음식, 간식, 화장실, 장난감, 발톱 깎이, 브러시, 방묘문…….


  다음 날. 출근 후 틈날 때마다 그 고양이 영상을 보았다. 영상을 팀 분들께도 보여드리자 나와 까만 고양이를 함께 처음 본 팀원분이 말했다.

  “그때 그 글램핑장 고양이들이 계시였나 봐요!”

  생각할수록 계시가 맞았다. 고양이 기운을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받은 건 난생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우리 팀에서 집사 경험이 있는 가족이 있는 사람은 나뿐. 그래서 묘연을 점지받은 건가.

  “오늘 꼭 구조될 거예요! 내일 소식 들려주세요.”

  팀 분들의 따뜻한 응원을 받으면서 이 묘연이 빨리 시작되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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