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우리 돈 귀신~”
학창 시절 늘 용돈 받는 날 전에 용돈을 다 쓰고는 추기 용돈을 타려고 들러붙는 내게 엄마가 한 말이다. 그리고 난 요즘 이 말을 리지에게 똑같이 하고 있다.
“아이고 우리 돈 귀신~”
물론 리지는 나처럼 질척거리는 하수의 돈 귀신은 아니다. 귀여운 외모로 집사를 홀려 사달라는 말 없이도 물건을 계속 사주고 싶게 만드는 고단수 돈 귀신이니까. 그래서 리지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집은 고양이 원목 가구, 고양이 장난감, 고양이 식기, 고양이 가전, 고양이 간식, 고양이 빗, 고양이 숨숨집, 고양이 칫솔, 고양이 터널… 이 가득한 고양이 집이 되었다.
고양이 용품을 구경하다 보면 애완동물의 시대가 가고 반려동물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 동시에 ‘애완인’도 ‘반려인’으로 변모한 게 느껴진다. ‘애완인’의 사랑은 조금 일방적이었다. 개나 고양이를 사람의 룰에 맞춰야 하는 존재로 여겼으니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라는 영어 속담처럼 ‘애완인’은 집에 데려온 개나 고양이에게 사람이 먹다 남은 밥을 주고, 사람이 쓰는 가구의 남은 공간을 쓰게 했다.
반면, ‘반려인’의 사랑은 다분히 상호적이다. ‘반려인’은 절대 사람이 먹는 참치캔을 개나 고양이에게 주지 않는다. 사람에 맞추어 가공된 참치에는 기름이나 염분이 많아 개나 고양이의 몸에 해롭단 걸 알기 때문이다. ‘반려인’은 개나 고양이에게 필요한 영양성분에 최적화된 전용 참치캔을 따로 사고, 개나 고양이의 신체구조에 맞게 나온 가구를 집안 곳곳에 배치한다. 나처럼 반려동물 용품 브랜드에서 집사의 지갑을 노리고 쓴 카피에 정확히 걸려들면서. 난 반려동물 용품 광고를 볼 때마다 광고 속 모델 고양이의 자리에 리지를 대입하며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팔불출이다.
‘맞아! 이런 캣타워가 있어야 리지도 창밖 구경 편하게 하지‘
‘그래. 이 장난감이 있으면 리지가 혼자 있을 때도 안 심심하겠어.’
‘높이 조절되는 식기가 없으면 진짜 리지 밥 먹을 때 불편하겠잖아!’
리지가 온 후 각종 온라인 쇼핑몰의 장바구니가 비는 날이 없었다. 한 고양이용품 배송을 기다리는 동안 벌써 다른 고양이용품을 검색하기 일쑤였다. ‘지름의 지름길’에 입성했달까.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고양이용품을 지켜보며 김박은 얼떨떨해했다.
“나 솔직히 여보 사는 양에 놀랐어.”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네 집 거실이 공룡 장난감, 공룡 책이 가득한 쥬라기공원(!)으로 변하듯이, 우리 집도 서서히 고양이 집으로 변해갔다. 창문 앞엔 캣타워, 바닥엔 고양이 탈구 방지용 매트와 사냥놀이용 숨숨터널, 벽 앞엔 스크래처, TV 앞엔 고양이 자동급식기와 물그릇… 사람의 취향과 편의에 맞춰져 있던 ‘인(人)테리어’는 그렇게 리지의 즐거움과 안전을 위한 캣(cat)테리어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사람에게 이로운 것 중 고양이에게 해로운 것과도 작별하기 시작했다. 김명철 수의사님 부부의 유튜브 채널인 <미야옹철의 냥냥펀치>의 ‘고양이 집사에게 주고도 욕먹는 선물 List’ 영상을 보았을 때였다. 해로운 물건의 첫 타자로 아로마 에센셜 오일이 등장했다. 김박과 나는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같은 제품을 떠올린 것 같았다.
‘포스트-푸 드롭스(Post-Poo Drops). 이제 널 보내줘야겠구나.’
직역하면 ‘똥 싼 후 몇 방울(!)’이라는 적나라한 이름을 가진 이 제품은(어떻게든 귀엽게 의역해보자면 ‘누고 톡톡’) 호주 스킨케어 전문 브랜드 이솝에서 만든 오일 타입의 변기 탈취제다. 생김새는 상당히 고상하다. 진갈색 몸체에 스포이드가 달린 검은색 뚜껑이 달려 있어 호텔 세면대 위에 놓기에 손색이 없는 비주얼이니까. 김빅과 나는 그간 이 제품으로 신혼의 달콤함으로도 덮을 수 없는 각자의 똥내(너무 적나라하니 앞으로 ‘잔향’이라 부르겠다. 잔향의 뜻은 남아있는 향기)를 덮어 왔다. 레몬 껍질, 탠저린 껍질, 일랑일랑 꽃 오일이 주성분인 샛노란 오일을 변기에 두세 방울 떨어뜨리면 레몬 향이 맹렬한 기세로 콧속을 파고들어 잔향을 지워주기 때문이다. 결혼은 KCC건설 스위첸 광고가 말했듯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 함께 지어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제품으로 상대 문명의 피해(!)를 최소화해 왔다. 제품 겉면의 설명에도 배려심의 강력한 작동 메커니즘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화장실에서 격렬한 활동(vigorous activity)이 일어났을 때, 다음에 올 사람들을 배려해 세심히, 공들여 만든 이 제품 몇 방울을 물 내린 변기 속에 희석하세요.
그런데 인간에게 이렇게나 이로운 물건이 고양이에겐 해로운 것이었다니. 김명철 수의사님은 설명하셨다.
“고양이는 간에 독성물질이 들어왔을 때 소화하는 분해효소가 선천적으로 부족합니다. (개에게 잘 쓰이는) 일반적인 약도 고양이에겐 절반 정도밖에 사용을 못 하기도 해요. 심지어 못 쓰는 약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특히 고양이에게 위험한 향기로 감귤, 레몬, 자몽에 포함된 모노테르펜 탄화수소류가 콕 집어서 자막으로 등장했다. 우리는 바로 리지와 함께 쓰는 거실 화장실에서 이 제품을 뺐다. 그리고 우리만 쓰는 안방 화장실에서만 이 오일을 쓰고, 리지의 안방 화장실 출입을 막기로 했다. 깨달았다. 만남은 반드시 어떤 것과의 이별과 동시에 일어나면서 삶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놓는다는 걸.
집의 겉모습 외에 우리가 집 곳곳에서 하는 행동도 바뀌어 갔다. 리지가 다치지 않도록 바닥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부엌에 생긴 룰은 ‘식탁의자 확 빼지 않기’. 나와 김박이 밥을 다 먹을 때쯤 리지가 근처 바닥에 털썩 잘 드러눕기 때문이다. 리지는 누운 채 완두콩 콩알만 한 앞, 뒷발의 발가락 사이사이가 다 보일 정도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곤 한다. 우리가 일어날 때까지 꼬리로 바닥을 툭, 툭 치며 이렇게 핀잔을 준다.
“내 밥은?”
이미 의자 다리로 리지를 몇 번 밀쳐 놀라게 한 전적이 있는 나는 더욱 조심하면서 의자를 리지가 없는 쪽으로 살며시 들고 뒤로 천천히 뺀다. 리지에게 왜 넓은 거실을 놔두고 굳이 여기 와서 눕냐고 핀잔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리지를 살피면서 우리의 일상엔 전에 없던 리듬이 생겨났다. 어떤 움직임은 전보다 더 빨라졌고, 어떤 움직임은 전보다 더 느려졌으며, 어떤 움직임엔 시선이 더 오래 머물게 되었으니까.
리지 덕에 다른 고양이들에게도 시선이 더 갔다. 어느 날 아파트 안을 산책하는데 높다랗게 서 있는 소나무 옆 낮은 풀숲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볼일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을 많이 만났는지(아니면 끊을 수 없는 어떤 절체절명의 타이밍이었는지) 고양이는 눈을 감고 계속 볼일을 보았다. 다른 어느 날엔 풀숲으로 들어가는 고양이의 똥꼬를 보았다(똥에 관련된 것만 자꾸 보이는 건 우연이겠지…?). 이후 산책길에서 화단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키 큰 소나무보다 아담한 풀숲에 더 눈길이 자주 간 것이다. 화단에 앙상한 잔가지가 많은 나무나 시든 풀숲이 많은 것도 좋아 보였다. 고양이에게 좋은 은신처가 되어줄 테니. 한 존재를 깊게 알면 세상의 구석구석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집안 곳곳엔 리지를 배려하는 물품이 늘어갔다. 끝에 테이프를 붙여 표시한 리지 전용 밥숟가락, 식기건조대 맨 아래칸을 차지하기 된 리지 전용 밥그릇 2개, 리지 간식 전용 미니 밀폐용기, 집사 전용 노랑 수세미 옆에 나란히 건 리지 전용 분홍 수세미까지(사람 음식 냄새가 식기에 배지 않도록 수세미를 구분하여 씀). 리지는 당당히 가족 N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물론 그렇다고 리지가 집안일도 N분의 1로 해주진 않지만).
변화된 집을 보며 생각한다.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놓여있을 때,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궁금증과 고민거리 때문에 바위가 부서지듯이 기존의 생각을 부서뜨리게 되고, 새로운 시선과 삶의 형태를 갖게 된단 걸. 이 과정에서 마음 가득 사랑이 차오르면서 리지와 우리 시이의 묘연은 더없이 끈끈해졌다.
임보 열흘째 날. 삼냥이 집사님 부부는 김박과의 식사 자리에서 물으셨다.
“혹시 리지 임보는 언제까지 가능할 것 같아? 슬슬 입양 홍보도 생각해야 해서…”
김박은 답했다.
“평생요.”
그렇게 우린 임시보호를 평생보호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