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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찌 Oct 22. 2023

헐거워지고 싶을 땐 고양이를 본다

  초여름의 어느 날. 창문을 열었더니 기분 좋게 선선한 바람이 뺨으로 불어왔다. 두꺼운 창문에 가로막혀있던 새소리가 노이즈캔슬링이 해제된 듯 집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난 오래 입어 목 부분이 느슨해진 반팔티와 헐렁한 반바지를 입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리지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막 잠에서 깨 털이 좀 눌린 채로.


  리지는 곧 창문 앞에 놓인 전용석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갈색 미니 매트가 깔려있는, 높이 50cm 정도 되는 이 대형 리빙박스는 리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 중 하나다. 리지는 자리에서 식빵 자세를 취하더니 창밖 구경을 시작했다. 곧 까치 한 마리가 아래쪽 소나무 윗머리에 날아와 앉았다. 까치는 목청 높여 울었다. ‘깍깍’으로 알았던 까치 울음소리는 자세히 들어 보니 ‘싸악 싸악’ ‘쌔엑쌕’에 더 가까웠다. 까치가 앞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날아가자, 리지는 고개를 따라 돌려 까치가 사라진 곳을 한참 바라봤다. 미련이 잔뜩 묻은 눈빛으로. 까치가 떠난 소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며 끊임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일어나서 가까이 가 보니 다른 나무 이파리들도 초록빛 잔물결을 이루며 일렁거렸다. 리지를 따라 쉬자 같은 풍경에서도 더 많은 움직임이 보였다.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도 눈으로 좇아보았다. 마음이 나사가 풀린 듯 느슨해졌다.


  우리 집 공식 ‘쉼 박사’ 리지는 이렇게 우리에게 헐거운 무드를 선물해 준다. 주말에 리지를 보면 시계 속 시침과 분침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특히 리지는 한 주를 일을 하는 ‘월화수목금’과 쉬는 ‘토일’로 나누어 보내는 우리와 달리, 매주를 ‘토토토토토토토’ 또는 ‘일일일일일일일’처럼 느긋하게 보내는 게 부럽다. 난 리지에게 가끔 이렇게 말한다.

  “진짜 냥 팔자 상팔자네.”

  리지는 볕이 좋은 오후엔 전용석 위에서 햇살을 등지고 누워 등을 뽀송하게 말린다. 점심을 먹고 나선 넓은 캣방석 위에 몸을 쭉 뻗고 쿨쿨 자며, 늦은 오후엔 포근한 이불 사이에서 볼록한 뱃살을 노출한 채 그루밍을 한다. 이럴 때 리지를 보면 나도 헐거운 무드에 빠져든다.


  자기가 누리고 싶은 방식대로 매시간을 충만하게 누리는 리지. 반작용인지 이런 리지를 보면 내 시간을 온통 강탈당한 것 같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시절, 겨울에 모 브랜드의 신제품 피자 광고 영상을 촬영할 때였다. 이른 아침 촬영장에 도착하니 높다란 세트장의 시멘트 벽에서 시린 한기가 솔솔 내려왔다. 피자 광고 촬영 소요시간은 보통 24시간. 난 ‘오늘도 이 추운 데서 날밤 꼴딱 새겠네’ 하며 시작부터 낙담했다. 사실 촬영은 내가 카피라이터의 업무 중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촬영장에선 시간을 내 뜻대로 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광고 촬영은 감독님의 디렉션 하에 배우가 연기를 하고, 광고회사의 담당 직원과 광고주 담당자가 수정 방안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한정되어 있었다.

  예로 새우가 불판 위로 날아드는 씬을 촬영할 때였다. 먹음직스럽게 새우를 굽고, 불판과 조명을 알맞게 세팅하는 데만도 약 1시간이 걸렸다. 음식이나 촬영 장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준비가 되기까지 기다리는 일. 어렵게 슛이 들어간 이후에도 예상치 못한 난관이 많았다(원래 음식 광고 촬영은 가장 어려운 촬영으로 악명이 높다). 이번 테이크엔 날아가는 새우끼리 너무 몰려있어서 NG. 다음 테이크엔 새우가 날아드는 각도가 안 좋아서 NG. 그다음 테이크엔 새우 숫자가 왠지 적어 보여서 NG…. 다시 슛이 들어가기 전에 새우를 새로 준비하고, 지저분해진 주변을 정리하고, 수정사항을 서로 합의하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광고에서 3초도 나오지 않을 새우 씬에 모두가 약 3시간째 매달려 지쳐 있을 때, 옆에 있던 사수가 말했다.

  “차라리 연기 못하는 배우가 더 나은 것 같아요. 새우한텐 연기 디렉션을 줄 수가 없으니까요.”


  그날 종일 소통이 안 되는 새우, 소고기, 치즈와 씨름하고 돌아오는 길엔 마음이 너덜너덜했다. 내 목표가 CD(Creative Director, 크리에이티브 제작 과정을 총괄하는 사람. 보통 광고회사 제작팀의 팀장을 이야기함)가 되는 것이었다면 현장을 조금 더 즐길 수 있었을까. 상상을 비주얼로 구현하는 것보다 앉아서 아이디어를 내고 카피 쓰는 일을 훨씬 좋아했던 내게 촬영은 정말 고역이었다. 주도권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24시간 동안 ‘시간 폭식자’에게 내 시간을 잡아먹힌 것만 같아 괴로웠다.


  리지와 함께 헐거워져 본 후 난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낼 때 가장 충만해지는지를 선명히 깨닫게 되었다. 바로 내가 주도권을 갖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누리는 시간. 편안히 앉아있는 리지를 보며 앞으로 이런 시간을 점점 늘려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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