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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찌 Oct 22. 2023

안락함을 사수하는 자세

  노트북 어댑터 위에 배를 깔고 온찜질을 즐기는 리지의 사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리지 사진 중 하나다. 작년 겨울에 찍은 사진이다. 당시 재택근무를 하면서 내 노트북과 연결되어 바닥 위에 놓여있는 노트북 어댑터가 뜨끈해지면 리지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리지는 어댑터 위에 엎드려 배 찜질을 하거나 한쪽 손바닥을 올려 젤리 찜질을 하길 좋아했다. 일하다 가끔 책상 밑을 보면 ‘좋은데 왜?’ 라는 표정으로 몸을 지지는 리지와 눈이 마주쳐 피식 웃곤 했다.


  마침 어댑터가 놓인 곳은 우리 집 방바닥 중 가장 뜨끈한 곳. 발바닥으로 보일러 배관이 촘촘히 둘러진 따뜻한 바닥을 감지해 내는 능력이 있는지 리지는 이곳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그리곤 노곤할 때마다 이곳을 자신의 전용 건식 사우나처럼 애용했다. 리지는 여기 누워 세네 시간씩 푹 잤다. 전자파가 해로울까 봐 어댑터를 곧 책상 위로 치웠지만 리지의 온찜질 모습은 잊지 못할 겨울 기억을 남겼다. 고양이만큼 자신의 안락함을 사수하는데 적극적인 존재가 있을까. 자기에게 맞는 편안함을 꼼꼼히 누리는 리지의 모습에 안락함을 사수하는 데 서툴렀던 나의 시린 한때가 떠올랐다.


  광고회사에서 일한 지 9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당시 ‘광고’의 자유성보다 ‘회사’의 보수성을 맞닥뜨리는 날이 더 많아지자 난 혼란스러웠다. 실제 제작 과정을 겪어보니 창의력보단 상사나 광고주의 의중 및 취향을 파악하는 이해력이 더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도 이견이 없을 빅 아이디어’를 낼 실력이 안되기도 했고. 그래서 자주 설득에 실패한 나는 전혀 동의가 되지 않는 ‘윗분들’의 관점을 풀어내는 데 많은 시간을 써야 했다. 새벽 2시에 퇴근한 어느 날. 너무 지쳐서 분노할 힘도 없이 택시에 몸을 실었다. 도로엔 차도 몇 대 없었다. 잠시 후 차창 밖으로 오렌지빛 풍경이 펼쳐졌다. 한밤중이라 다른 빛의 간섭을 받지 않은 가로등 불빛이 대교로 맹렬히 쏟아져내린 것이다. 시멘트 바닥부터 철제 방음벽까지 전부 진한 오렌지빛이었다. 원래 오렌지빛은 따뜻한 색이지만 그날은 섬뜩하리만치 차갑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난 속으로 내 상황에 대한 날 선 질문을 쏟아냈다.

  ‘언제까지 이렇게 몸도 버리고 나도 버리면서 일해야 될까?’

  ‘이게 과연 ‘업계 특성상 어쩔 수 없다’면서 버텨야 되는 일일까?’

  야근하며 들은 에픽하이의 <빈차> 속 가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라지 않으면 성장통도 그저 pain’. 난 아무런 지적 즐거움도, 깨달음도 얻지 못했던 그날의 야근이 소득 없는 고통이었단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지나 이 기분을 회상하는 내게 한 업계 선배는 이런 말을 해 주었다.

  “힘들었겠다. 그런데 그럴 땐 환경을 바꿔 달라고 해야 해. 우리는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잖아. 그럼 좋은 생각을 낼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도 우리의 의무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해. 그리고 회사는 직원이 요청하면 환경을 좋게 바꿔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거고.”

  내게 평안한 환경을 갖추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이 아쉬웠다. 그 시절 이런 조언을 들었으면 뭐라도 해보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왜 난 회의실에서 아이디어를 발표할 때 냈던 스스럼없는 목소리를 정작 나를 위해선 내지 못했을까. 나만 요구를 하면 동료들에게 이기적이라고 욕을 먹을 까봐, 혹은 나의 싫은 소리를 듣는 다른 사람의 표정을 보기 싫어서 등등 나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나의 불편함을 외면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리지처럼 나에게 가장 안락한 환경을 찾아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나에게 맞는 환경에서 내가 추구하는 행복을 꼼꼼하게 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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