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찌 Oct 22. 2023

우리 사이에 자라난 루틴

  루틴은 어떤 관계가 안정화됐다는 증표다. 썸 타는 관계를 예로 들면 둘이 가까워질수록 연락을 하는 루틴이 만들어진다. 한쪽에서 먼저 출근 중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다른 쪽에서도 출근 준비를 하면서 응원을 해주는 모닝 루틴이 먼저 생기니까. 이후 특정 요일엔 웬만하면 다른 약속을 잡지 않고 서로를 만나는 데이트 루틴이 생기며, 자기 전엔 침대에 누워서 그날 있었던 좋았던 일, 속상했던 일, 보고 싶은 마음을 통화로 전하는 굿나잇 루틴도 생긴다. 서로 간의 사랑과 신뢰는 이러한 루틴을 먹고 자라난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한 대부분 비슷비슷한데 뻔한 시간에 뻔한 반응을 꼬박꼬박 한다는 건 상대에 대한 안테나를 변함없이 잘 켜고 있다는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증표의 뉘앙스가 ‘지켜보고 있다(찌릿)’보다는 ‘지켜주고 있어(든든)’ 쪽이 더 좋겠지만. 증표가 쌓일수록 서로에 대한 믿음은 두터워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리지와 우리 사이에서도 다양한 루틴이 생기고 있다. 대게 리지가 귀여움이 덕지덕지 묻은 행동을 하면 우리가 몸서리치며 반응을 하는 식의 루틴이다. 대표적인 것이 ‘또띠따또’ 루틴. 거실에 둔 자동급식기에서 예약된 시간에 예약된 양만큼 사료가 나오는 알람 소리다. 매일 아침 7시 반과 12시마다 ‘또띠따또’ 소리가 나면 리지가 캣타워에서 급하게 ‘우당탕탕’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난다. 이 소리에 김박과 나는 여지없이 “큭큭” 하며 실소를 터뜨린다. 매일 반복되는 이 ‘또띠따또-우당탕탕-큭큭’의 사이클의 마지막에 최근엔 ‘푸ㄹㄹ 푸ㄹㄹㄹ’도 추가되었다. 매일 아침 7시 35분쯤, 자동급식기에서 나온 사료를 다 먹은 리지가 잠든 나와 김박 사이로 뛰어 와 우렁차게 골골송을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잠결에 눈을 떠보면 기분 좋게 입맛을 다시는 리지가 보인다. “나 아침밥 잘 먹었다!” 하고 자랑하는 리지의 얼굴은 귀여움 투성이다. 리지에게 우리의 숙면은 뒷전인 게 분명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매일 잘 기념하고, 기분 좋은 에너지를 주변에 전달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좋은 애티튜드로 보인다(‘밥자랑 개근상’이라도 줘야 하나).


  리지가 펫시터님 앞에선 또 다른 ‘또띠따또’ 루틴을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리지를 아껴주시는 한 펫시터님은 리지가 알람이 울리기 몇 분 전부터 안방 문 앞에 앉아있다가 ‘또띠따또’가 울리자마자 허겁지겁 거실로 뛰쳐나와 사료 그릇으로 달려갔다고 전해주셨다. 펫시터님은 리지 모습에 혼자 엄청 웃으셨다면서 채팅에서 말씀하셨다.

  “역시 신데렐라ㅋㅋㅋㅋㅋㅋ 12시 딱 되니 나오네요.”


  또 다른 루틴으로는 ‘젤리쫙쇼’가 있다. 리지는 캣소파에 앉아있다가 맞은편 책상에 앉아있던 내가 일어나면 가끔 몸이 부르르르 떨릴 정도로 기지개를 쫙 켠다. 이때 동그란 찹쌀떡 같이 뭉쳐있던 발가락을 사방으로 쫙 뻗는데, 쫙 펴진 분홍 젤리(발바닥) 사이가 다 보이는 모습이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가 없다. 나까지 뭉쳐있던 어딘가가 시원하게 펴지는 느낌. ‘쫙-우와’도 빼놓을 수 없는 우리 사이의 루틴인 셈이다. 가끔 리지는 이 루틴에 입을 쫙 벌렸다 닫으면서 ‘키야악’, ‘끄윽’ 하는 하품 소리를 덧댄다. 3살도 안 된 몸에서 어떻게 100세 어르신의 하품 소리가 나는지.


  리지의 이러한 귀여움을 무탈하게 유지하기 위해 집사들만 하는 루틴도 있다. 바로 청소. 리지가 언젠가부터 집을 돌아다닐 때 바닥에 코를 자주 킁킁대면 청소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바닥에 과자 부스러기나 머리카락 뭉치 등 리지의 흥미를 끄는 것들이 많이 흩뿌려져 있다는 뜻이니까. 김박과 나는 펠트 재질의 캣터널에 잔뜩 엉겨 붙은 머리카락 모래 리지 털을 본 후, 그리고 리지의 물그릇이 있는 소파 옆과 식탁 사이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 뭉치를 본 후 청결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청소를 미루면 리지가 먼지 구덩이 속에서 숨 쉬고, 먹고, 놀게 된다는 걸 깨달아서다.

  우리는 잊지 않고 주말 1회 대청소를 한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한 뒤 청소기와 물걸레를 차례로 돌린 후, 돌돌이로 이불, 캣터널, 캣타워 카펫, 캣소파에 엉겨 붙은 털을 꼼꼼히 제거하는 것이다. 꼭 해내야 하는 일로서 되새기기 위해 우리는 이 루틴에 ‘숙원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리지와의 사냥놀이도 까먹지 말고 지켜야 하는 루틴이다. 다행히 리지는 집사들이 사냥놀이 시간을 잊지 않도록 사전 공지를 빼먹지 않고 해 준다. 밤 10시, 그러니까 놀이시간인 11시가 되기 1시간 전부터 옆에 와서 기대감이 차오른 눈빛으로 치근덕대기 때문이다. “냐아아오-! 냐앗!” 하는 울음소리는 “조금만 일찍 놀자”보다 “당장 낚싯대를 들지 못할까!”라는 호통에 가깝다.


  물론 모든 루틴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리지의 거사(!) 루틴은 조금 난감하기 때문. 리지는 꼭 우리가 저녁밥을 다 먹고 양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다면 볼일을 본다. 똥냄새로 우리를 먹이는 걸까. 아니면 그저 거사를 우리의 비호를 받으며 잘 마무리하고 싶은 걸까.

  일단 리지가 화장실에 따라 들어오면 우린 칫솔을 문 채 리지의 자세를 살피며 긴장한다. 리지가 엉덩이를 화장실 모래 쪽에 바짝 대면 소사(!)이기 때문. 그러면 양치를 계속해도 괜찮다. 그런데 리지가 엉덩이를 높게 들고 양쪽 허벅지에 힘을 빡 주면? 200% 거사(!)다. 곧 코를 찌르는 구수한 냄새가 퍼진단 이야기다(참고로 귀여움과 똥 냄새는 정비례한다). 이럴 때 김박과 나는 서로에게 “경보, 경보!”라고 말하면서 한 사람은 재빨리 치약, 칫솔, 양치컵을 들고 부엌 싱크대로 향하고 다른 한 사람은 화장실 환기 버튼을 누른 후 리지의 항문을 닦아 줄 준비를 한다.

  아무래도 우리 관계가 더 끈끈해지려면 리지가 거사 루틴만은 좀 조정해줘야 할 것 같다.





(‘또띠따또’ 루틴 후 ‘ㅍㄹㄹ송’을 부르러 달려온 리지)


이전 13화 취미는 고양이 용품 소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