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 스피드를 좋아하는 내 성격에 어울리는 말은 ㅊ보다 ㅎ으로 시작하는 것이 많다. ‘차분하게’, 천천히’보다는 ‘힘차게’, ‘한 번에’ 같은 류. 태생적으로 조심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내 몸엔 ‘무조심의 역사’가 무성하게 새겨져 있다. 무릎 아래엔 엄지 손가락 만한 멍이(급히 눕다 침대 프레임에 부딪친 것으로 추측), 팔목 근처엔 얇게 긁힌 상처가(민첩하게 지나가다 서랍장 모서리에 긁힌 것으로 추정) 가실 날이 없다.
반복되는 무조심으로 “아!”와 “헐!”을 반복하는 나와 산 지 3년째. 김박은 이제 벼락같은 생활 소음에 꽤 적응했다. 어느 주말엔 내가 일어나면서 침대 협탁 위의 폰으로 손을 뻗다가 그만 옆에 있던 무드등을 쳤다. 무드등은 철제 협탁 위로 쓰러졌다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까가가강!! 텅터러덩!!”
난 무드등을 바로 세운 뒤 먼저 일어나 작은방에 있던 김박에게 가서 말했다.
“무드등을 떨어뜨렸네. 미안”
김박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아 등 떨어진 거였어? 난 여보가 얼음 푸나 했지.”
주말 아침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내가 으레 냉동실의 얼음 바스켓 속에 스텐 얼음 스쿱을 힘차게 꽂아 넣었다가(스쿱이 얼음과 부딪치며 ‘와라라락!!’ 소리가 남) 재빨리 떠내는(남은 얼음이 빈 바닥으로 쏟아지면서 ‘바라라락!!’ 소리가 남) 소리인 줄 알았다는 거다. 그 소리가 그렇게 우렁찼니...?
우리 집엔 거친 내 손을 못 버티고 떠난 살림살이도 많다. 최근의 타깃은 주방 샤워 헤드였다. 내가 샤워 헤드를 수전에 너무 힘차게 꽂아 넣었는지 플라스틱 이음새에 쩍 하고 금이 갔기 때문이다. 물이 새서 결국 샤워 헤드를 교체했는데, 며칠 뒤엔 그 헤드를 너무 힘차게 빼는 바람에 헤드가 수전에서 뚝 떨어져 나왔다. 힘차게 똬리를 트는 아나콘다처럼 요동치는 수전과 거기에서 세차게 뻗어 나온 물줄기는 정수기를 강타했고, 정수기에서 반사된 물로 부엌은 워터밤 페스티벌 현장으로 변신했다. 설거지를 단숨에 물쇼로 뒤바꾼 아내의 재주에 김박은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겨우 물을 잠그고 샤워 헤드를 부드럽게 끼우면서 김박은 유치원생을 가르치듯 말했다.
“샤워기는 스으윽(넣고), 스으윽(빼고) 하는 거야. 팍!(넣고) 팍!(빼고)? 아니야아.”
난 리지도 내 거친 손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특히 잘 때 ‘침대에서 홱 돌아눕지 않기’를 지키는 것이 포인트. 리지는 밤에 내 다리 사이에서 자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우리의 밤 수면 패턴에 적응해 준 리지는 매일 자정쯤 우리가 거실 불을 끄면 침실로 따라 들어온다. 우리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동안 리지는 침실 캣타워 꼭대기 층에서 쉬다가 우리가 불을 끄고 잘 준비를 하면 침대와 높이가 가장 비슷한 층까지 발판을 한층 한층 내려왔다가 내 다리 사이로 폴짝! 뛰어든다. 그리곤 내 왼쪽 허벅지에 자기 등을 착 붙여 앉고는 내 무릎을 목침 삼아 잔다. 리지의 머리 무게를 느끼며 자는 기분은 꽤 좋다. 고양이는 집사를 신뢰할 때만 집사 곁에서 자기 때문이다. 대신 난 돌아누울 때마다 리지가 내 다리에 치여서 날 못 믿게 되어버리지 않도록 늘 조심한다. 잘 돌아눕는 스킬도 터득했다. 먼저 턱살이 접힐 만큼 고개를 살짝 들어 리지가 다리 사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한다. 다음으로 바꾸고 싶은 방향 반대쪽의 다리를 가슴팍까지 천천히 들어 올린 후, 올린 다리를 다른 다리 쪽으로 집어넣는다. 이렇게 하면 문진처럼 이불을 누르는 리지가 움직이지 않아도 자세를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살펴보니 리지도 나 못지않은 ‘무조심족’이다. 사냥 놀이를 하다가 뛰면서 기둥에 발목을 살짝 부딪치기 일쑤니까. 놀아달라고 발라당 누울 때도 누울 자리를 봐 가면서 눕지 않는 리지는 의자 다리에 몸을 부딪칠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무조심의 빈도는… 이상하게 점점 늘어가고 있다. 난 쭈그려 앉아 리지에게 잔소리를 했다.
“리지야, 조심해야지이. 그렇게 팍 팍 누우면 어떻게 해.”
지나가던 김박은 그런 날 보며 씨익 웃었다. 표정에서 속마음이 읽혔다.
‘여보가 할 소리가 아닌 거 같은데?’
웃음이 터졌다. 리지에게서 종을 초월한 무조심성이 발현된 건 사실 나 때문이 아닐까. 내가 여기저기 꿍꽝거리고 다니는 걸 배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고양이는 집사의 거울이구나...